•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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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심장

내용

기술의 표준화

시계는 오랜 기간 수많은 워치메이커가 쌓아 올린 지혜의 탑으로,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은 모든 워치메이커의 주요 관심사였다. 소형화와 정확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해결하는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이야말로 시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버지, 실런더, 듀플렉스 등 다양한 방식의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이 개발됐지만 오늘날 표준으로 자리잡은 것은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는 영국의 워치메이커 토마스 머지가 1754년 고안했다. 그는 다양한 실험을 거쳐 1769년 영국의 샬럿 왕비에게 바치는 시계에 처음으로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를 적용했다. 이스케이프먼트 휠과 이를 제어하는 집게 형태의 레버로 구성된 초기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는 이후 몇 번의 변화와 수정을 거쳐 지금의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로 발전했다.


크리스토프 클라레 마에스토소의 디텐트 이스케이프먼트. 오버 뱅킹을 방지하는 장치와 충격을 흡수하는 사파이어 크리스털 브리지로 디텐트 이스케이프먼트의 단점을 상쇄한다.



장단점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가 표준이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밸런스 휠을 이스케이프먼트 휠로부터 분리해(Detached) 자유로운 회전을 보장하고 마찰을 최소화함으로써 정확성을 높인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단순한 구조와 가공이 어렵지 않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손목시계에 적합한 작은 크기와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작동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에도 단점은 존재한다. 팰릿 포크의 주얼과 이스케이프먼트 휠의 이빨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마찰(sliding friction)로 인해 에너지 전달 효율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것과 마찰을 줄이기 위해 주얼의 마찰 면에 윤활유를 주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를 개발한 조지 다니엘스는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에 윤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윤활유가 마르거나 열화로 인해 안정적인 작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시계를 정기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


F.P 주른의 크로노미터 옵티멈. 두 개의 이스케이프먼트 휠을 사용한 고성능 2축 이스케이프먼트(High-Performance Bi-axial Escapement)는 윤활이 필요 없는 데다가 레몽투아 시스템과 결합해 50시간 동안 동력을 일정하게 전달한다.



재발견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가 표준이라고 하지만 모든 시계에 해당하는 건 아니다. 최근에는 독특한 이스케이프먼트를 사용하는 소규모 개인 제작자나 독립 브랜드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마찰이 적고 윤활이 필요 없는 과거의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을 응용하곤 한다. 브레게가 고안한 에샤프먼트 내추럴(Echappement Naturel) 이스케이프먼트가 대표적이다. 이 방식은 복잡한 구조와 정교한 제작을 요하는 이스케이프먼트 휠로 인해 대량 생산에 적합하지 않고, 두 개의 이스케이프먼트 휠이 맞물릴 때 이빨 사이의 공간(Backlash)을 세밀하게 조정해야 하는 점이 단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밸런스 축으로 에너지를 직접 전달하기 때문에 효율이 높고 부품의 마모가 적어 정확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F.P. 주른, 카리 부틸라이넨, 로랑 페리에가 이러한 원리를 응용하는 대표적인 워치메이커다. 



율리스 나르덴의 미래이자 혁신 기술의 결정체 이노비전 2. 프릭에서 선보였던 듀얼 율리스 이스케이프먼트와 실리시움 기술을 융합해 독자적인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을 완성했다.



마린 크로노미터에서 사용했던 디텐트 이스케이프먼트(또는 크로노미터 이스케이프먼트)를 차용한 경우도 있다. 얇고 긴 막대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인 디텐트 이스케이프먼트는 마찰이 적어 윤활이 필요 없고, 뛰어난 정확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충격이 가해지면 이스케이프먼트 휠의 움직임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해 손목시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장됐다. 최근에는 이런 약점을 보완해 손목시계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할 정도로 발전했다. 어반 유르겐센이나 크리스토프 클라레가 여기에 해당한다.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보다 주얼을 많이 사용하지만 윤활이 필요 없는 방식도 존재한다. 로저 스미스는 조지 다니엘스로부터 물려받은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하나의 축에 두 개의 휠을 겹쳐놓은 스승의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를 보완해 두 개의 휠을 하나로 합친 싱글 휠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를 완성한 것이다. 로저 스미스가 개발한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는 하나로 합쳐진 휠 덕분에 더 안정적이고 정확하다. 이후에도 연구를 거듭한 그는 더 작고 가벼운 싱글 휠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를 개발하는데도 성공했다.




로저 스미스 싱글 휠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 로저 스미스는 코액시얼 휠의 크기를 점차 줄이고 있다. 작고 가벼운 코액시얼 휠은 공간 활용도를 높이고, 토크가 약한 메인 스프링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마찰과 마모를 줄여 장기간 안정적인 작동을 보장한다. 



미래를 보다

최근에는 미래지향적인 차세대 이스케이프먼트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LIGA나 DRIE와 같은 첨단 공법으로 제작한 신소재 부품을 사용해 마찰을 최소화하고 에너지 효율의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체형 밸런스 휠과 팰릿 포크, 그래스호퍼 이스케이프먼트로 이루어진 파르미지아니의 센피네(Senfine), 실리시움 기술을 기반으로 한 율리스 나르덴의 듀얼 콘스탄트 이스케이프먼트를 예로 들 수 있다. 프로펠러처럼 생긴 휠을 회전시켜 발생한 공기의 흐름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그뢰벨 포시의 메커니컬 나노(MECHANICAL NANO) 시스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이스케이프먼트다. 

 

파르미지아니 센피네 무브먼트. 밸런스 휠의 진동각은 16°에 불과하며, 진동수는 시간당 115,200vph에 이른다. 70일 파워리저브를 제공한다.



그뢰벨 포시 메커니컬 나노 시스템. 이론상으로 기어 트레인과 레귤레이터를 없애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한다. 파워리저브는 무려 180일이나 된다.



아직 개발 단계에 있는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는 미지수다. 기존 패러다임을 뒤집거나 대량 생산 적합성 여부도 증명되지 않았다. 게다가 전통적인 워치메이킹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순수 애호가에게 환영 받지 못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하지만 워치메이킹은 언제나 도전과 혁신의 역사였다. 새로운 이스케이프먼트가 손목시계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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