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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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료 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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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지위

시계는 정보를 제공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부의 상징이나 단순한 취미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날짜나 크로노그래프 또는 문페이즈처럼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시계가 높은 인기를 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계가 제공하는 정보의 대부분은 시계 외적인 것이다. 시계가 아닌 주변 환경과 특수한 상황에 대한 정보인 셈이다. 반면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는 시계가 자신의 상태를 사용자에게 알려준다는 점에서 다른 기능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 시계가 상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비록 가능할지라도 정밀한 수준에 도달하기는 역부족이다. 무브먼트의 메커니즘이 원을 그리는 휠의 회전 운동과 레버의 단순한 움직임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작동 안정성의 시각화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를 시계에 담아낸 건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다. 그는 1780년 닻처럼 생긴 로터를 회전시켜 메인스프링을 자동으로 감는 회중시계인 퍼페추얼(Perpétuelle)을 오를레앙 공작에게 처음으로 판매했다. 브레게를 성공으로 이끈 이 시계에는 60시간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있었다. 브레게가 퍼페추얼에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를 추가한 이유는 로터가 메인스프링을 잘 감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 메인스프링을 감으면 그만인 핸드와인딩 시계와는 달리 셀프와인딩 시계는 메인스프링이 제대로 감기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주로 사용된건 마린 크로노미터와 레일로드 크로노미터 시계였다. 정확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은 시계에서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의 역할은 메인스프링을 감은 뒤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는지 알리는 것이었다. 그 증거는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있는 대부분의 시계에는 숫자가 새겨진 서브 다이얼과 바늘이 있는데, 메인스프링이 풀릴수록 바늘은 0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과거 크로노미터 시계의 경우 바늘이 반대로 움직인다. 풀 와인딩 상태에서 바늘은 0을 가리키고, 시간이 지날수록 높은 숫자를 가리킨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브랜드가 남아 있다. F.P. 주른의 크로노미터 수버랭, 글라슈테 오리지날의 세나토 크로노미터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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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제작된 브레게 퍼페추얼 No.15 회중시계. 다이얼 10시 방향에 60시간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자리하고 있다. ©Antiqu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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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진의 레일로드 회중시계. 당시에는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대신 업/다운이나 와인드 인디케이터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Antiqu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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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스 나르당의 마린 크로노미터. 현재 출시 중인 마린 크로노미터 컬렉션과 디자인은 큰 차이가 없지만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표시 방법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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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 주른의 크로노미터 수버랭. 메인스프링을 완전히 감았을 때 바늘은 0을 가리킨다. 전통에 입각한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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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에 제작된 랑에 운트 죄네의 회중시계. 발터 랑에의 소장품이기도 하다. 1815 업/다운에 영감을 주었다.



손목시계로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도 다른 기능처럼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왔다.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를 갖춘 최초의 대량 생산 시계는 예거 르쿨트르의 파워매틱이다. 1946년 예거 르쿨트르는 브랜드 최초로 범퍼 로터 방식의 셀프와인딩 칼리버 476을 탑재한 시계를 출시했다. 2년 뒤인 1948년에는 칼리버 476에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를 추가한 칼리버 481을 선보였는데, 이 무브먼트를 사용한 시계가 바로 파워매틱이었다. 파워매틱은 다이얼 12시 방향에 있는 부채꼴 모양의 작은 창을 통해 와인딩 상태를 표시했다. 시계의 탄생 배경에는 셀프와인딩 시계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셀프와인딩 시계가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와인딩이 문제없이 잘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를 추가한 것이다. 1953년 예거 르쿨트르는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있는 또 다른 모델을 출시했다. 다이얼 3시 방향에는 스몰세컨드, 9시 방향에는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자리한 시계의 이름은 퓨처매틱이었다. 크라운이 케이스백에 위치한 퓨처매틱은 특이한 구조만큼이나 독창적인 메커니즘을 자랑했다. 크라운을 돌려 메인스프링을 감을 수 없는 이 시계는 손목의 움직임에 의해서만 메인스프링을 감을 수 있었다. 당연히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됐다. 퓨처매틱은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 서브 다이얼과 바늘을 사용한 모델(칼리버 497) 그리고 ‘ㄱ’자 모양의 레버를 회전시켜 작은 창에서 와인딩 상태를 표시하는 모델(칼리버 817)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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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 르쿨트르의 파워매틱. 작은 창을 통해 와인딩 상태를 표시함으로써 디자인의 균형을 잡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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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거 르쿨트르 퓨처매틱. 끝부분에 브리들(Bridle)이 더해진 오늘날의 슬리핑(Slipping) 메인스프링이 아닌 핸드와인딩 무브먼트에서 볼 수 있는 메인스프링을 사용했다. 메인스프링이 완전히 감기면 범퍼 로터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해서 메인스프링이 끊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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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구조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는 보는 것과는 달리 구조가 복잡하다. 단순히 부품을 몇 개 추가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이로 인해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는 시계에 큰 부담을 안겨준다. 추가로 필요한 부품이 많기 때문에 고장과 오작동의 위험이 따른다. 특히 배럴과 직접 연결된 부품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시계가 멈춰버릴 수도 있다.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차동 기어로 배럴과 래칫 휠 또는 배럴 아버를 연결하는 것이다. 메인스프링을 감아주는 배럴 아버와 연결된 래칫 휠은 메인스프링이 풀리면서 회전하는 배럴과 운동 방향이나 회전 속도가 다르다. 메인스프링이 감기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래칫 휠 또는 배럴 아버와 연결돼야 하지만 시계가 작동하면서 메인스프링이 풀리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배럴과 연결돼야 한다. 한쪽 방향으로만 회전하는 이 둘을 연결해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일정 구간을 반복해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차동 기어의 역할이다. 차동 기어와 여러 휠로 구성된 메커니즘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예외도 있다. 페르디난드 베르투드의 크로노미터 FB1은 원뿔 형태의 부품을 사용한 독특한 메커니즘을 선보였는데, 이는 조지 다니엘스가 개발한 방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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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스 칼리버 DUW 4401. 시계가 두꺼워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독특한 메커니즘을 개발했다. 배럴 바닥에 구멍을 내고 배럴 아버에 빨간색과 흰색을 절반씩 칠한 휠을 연결한 뒤 그 위로 구멍이 뚫린 또 하나의 휠을 올린다. 두 휠의 차이는 톱니의 수로, 색이 칠해진 휠은 20개, 구멍이 뚫린 휠은 19개다. 배럴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유성 기어가 두 휠의 움직임을 동시에 제어하는데, 미묘한 회전속도의 차이로 와인딩 상태를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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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WC 포르투기저 오토매틱.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의 전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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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베르투드 크로노미터 FB1. 원뿔 모양의 부품이 와인딩 상태에 따라 수직으로 움직이는 것이 핵심. 주얼을 부착한 레버는 원뿔의 움직임에 의해 회전 반경이 커졌다 줄었다를 반복한다. 레버 축 맞은편에 연결된 또 다른 레버의 끝에는 톱니가 있는데 여기에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바늘이 꽂혀 있다.




표시 방법

파워리저브를 표시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워치메이커는 시계의 디자인과 전체적인 균형 그리고 콘셉트를 고려해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의 위치와 방식을 결정한다.


바늘

가장 흔하고 단순한 방식. 바늘이 움직이는 각도는 시계마다 다르다. 90~180° 정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360°에 조금 못 미칠 정도로 큰 각도로 움직이는 시계도 있다. 와인딩 상태를 서브 다이얼에 숫자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지만 숫자를 생략하고 선의 굵기만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랑에 운트 죄네 랑에 31

이름대로 31일이라는 긴 파워리저브를 자랑한다.


디스크

바늘을 사용한 방식보다 더 적은 공간을 차지한다. 색을 칠한 디스크를 회전시켜 다이얼에 난 창을 통해 와인딩 상태를 직관적으로 표시한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거나 디자인의 균형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할 때 유용하다. 노모스와 모리츠 그로스만이 좋은 예다.

모리츠 그로스만 베누 파워리저브

아워 휠 위에 놓인 반달 모양의 휠이 움직이며 브랜드 로고 아래에 놓인 창을 통해 와인딩 상태를 알려준다.



직선형

바늘과 비슷하지만 원이 아닌 수평 혹은 수직으로 레버나 기어가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시각적으로 강렬하다는 장점이 있다. 사각형 부품의 한쪽에 톱니를 새겨 기어와 연결한 레버가 수직으로 이동하는 파네라이 PAM00233이 대표적이다.

파네라이 PAM00233

직선 형태의 레버를 사용해 8일 파워리저브를 표시한다.



색다른 매력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는 핸드와인딩 시계의 경우 태엽을 다시 감아야 할 때를, 셀프와인딩 시계에서는 로터가 메인스프링을 잘 감아주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이처럼 시계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의 숨은 매력이다.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는 시계 디자인의 한 축이자 기술력과 창의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기도 하다. 기능과 디자인을 동시에 잡지 못한다면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 각각의 브랜드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정보 제공 방식을 달리하는 걸 지켜본다면 그 시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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