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12월, 롤렉스는 깜짝 놀랄 뉴스를 발표했다. 롤렉스 인증 중고(Rolex Certified Pre-Owned, 이하 RCPO)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이다. RCPO 시계는 롤렉스가 정한 기준에 따라 성능과 진품 여부를 검증받고, 2년간의 국제 보증이 적용되며, 롤렉스가 지정한 공식 리테일러를 통해서만 판매된다.
현재 RCPO 프로그램의 핵심 유통 창구는 부커러(Bucherer)다. 1888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출발한 부커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럭셔리 시계·주얼리 리테일러 중 하나로, 수십 년간 롤렉스의 핵심 파트너로 기능해왔다. 그리고 2023년, 롤렉스는 부커러를 전격 인수했다. 업계에서는 이 인수를 두고, 핵심 시장의 유통 안정성을 확보하고 브랜드가 중고 시장까지 간접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해왔다. 하지만 롤렉스 CEO 장-프레데릭 뒤포(Jean-Frédéric Dufour)는 지난 두바이 워치 위크 기조 연설에서 "기존 공식 판매점 네트워크 중심의 유통 구조를 유지할 것이며, 부커러 인수가 특정 소매점을 우대하기 위한 조치는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현실은 냉정하다. RCPO 시계는 현재 부커러가 진출한 국가에서만 실질적으로 접근 가능하다. 부커러 부티크가 없는 시장의 소비자에게 RCPO는 여전히 ‘그림의 떡’에 가깝다.
다른 시계 브랜드의 CPO 프로그램도 사정은 비슷하다. 브라이틀링도 부커러를 통해 CPO 프로그램을 론칭했다. 바쉐론 콘스탄틴과 IWC가 속한 리치몬트 그룹은 2018년 영국 대표 시계 거래 플랫폼 워치파인더(Watchfinder)를 인수한 후, 2024년부터 바쉐론 콘스탄틴의 CPO 프로그램을 맡겼다. 리차드 밀이 2015년부터 운영해온 프리-온(Pre-owned) 부티크 역시 브랜드의 승인을 받은 리테일러 네트워크를 통해 전개된다. 판매가 역시 브랜드가 관여하는 구조로, 브랜드 정책과 테크니션의 검증에 따른 감가, 위탁 가격 등을 모두 고려해서 결정된다. 시장 가격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완전한 자유시장 가격이라 보기도 어렵다. 리차드 밀 프리-온 부티크 역시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 전 세계 통틀어 10개 정도만 존재한다.
CPO의 이면에는 '가격'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놓여 있다. RCPO 시계의 가격은 롤렉스가 아닌 리테일러가 책정한다. 이는 곧 가격에 시장 시세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뜻이다. 인기 모델에 프리미엄이 붙어 있다면, RCPO 역시 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브랜드가 중고 가격을 직접 통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업계에서는 중고 시세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순간, 신품 수요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중고 가격이 높게 유지될수록 정가에 가까운 신품의 상대적 매력도는 유지된다. 반대로 브랜드가 중고 가격을 낮게 설정한다면, 소비자는 신품 대신 CPO 시계를 선택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는 부커러 같은 대형 리테일러가 진출하지 않았을까. 이는 시장 규모의 문제라기보다 유통 구조의 특수성에 가깝다. 한국은 전통적 의미의 독립 수입·유통 파트너 모델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고, 브랜드 본사나 그룹 자회사가 직접 운영하는 부티크 중심으로 유통 구조가 점점 확대돼왔다. 다시 말해, 한국은 럭셔리 브랜드가 직접 통제 가능한 판매망을 강화해온 성장 시장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글로벌 리테일러가 CPO 프로그램을 위해 별도의 유통 거점을 구축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CPO 프로그램의 장점은 분명하다. 브랜드가 보증하는 진품성과 품질, 그리고 공식 워런티는 일반적인 리세일 플랫폼이 제공하기 어려운 가치다. 만약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면, CPO 시계는 분명히 더 안전한 선택지다. 문제는 CPO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제도'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접근성과 가격이 여전히 브랜드와 리테일러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게재호
102호(1/2월호)
Editor
유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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