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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비용이 일반적인 무브먼트보다 반드시 더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48년까지 치열했던 지름 30mm 미만 크로노미터 무브먼트 경합에서 파텍 필립은 투르비용과 일반 무브먼트 두 개를 제출했다. 앙드레 지바흐가 조정한 기욤 밸런스의 앵커 칼리버 13VZ를 장착한 861119 모델이 854점을 획득해 승자로 등극했다. 반면, 동일한 크기의 투르비용 칼리버 861115 모델은 738점에 그쳐 7위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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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3000명의 직원과 1일 약 9000개 시계 생산량을 보유한 융한스가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 제조 업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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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폴로 우주비행사는 개인적으로 롤렉스를 더 선호하고 신뢰했다. 아폴로 13호 미션의 예비 우주비행사 존 레오나드 ‘잭’ 스위거트도 그중 하나였다. 정식 우주비행사 토마스 K. 매팅리가 아폴로 13호 출발 72시간 전에 병이 나는 바람에 잭 스위거트가 그를 대신해 아폴로 13호에 탑승했다. 이때 잭 스위거트는 롤렉스 GMT-마스터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갔다. 무사히 지구로 귀환한 후 그는 롤렉스에 ‘항상 정확할 수 있었다’고 감사의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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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1675년, 즉 17세기에 가장 중요한 워치메이커 중 한 명인 이삭 투레에게 자신이 고안한 헤어스프링과 밸런스를 사용한 첫 번째 회중시계 제작을 의뢰했다. 훗날 프랑스의 궁정 워치메이커로 임명받은 투레는 하위헌스의 레귤레이터 유닛을 자신의 발명품이라 속였다. 하위헌스는 당연히 항의했고, 투레는 사과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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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까지 워치메이커는 순수하게 수작업으로만 시계를 생산했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고용한 워치메이커이자 발명가 조르주 오귀스트가 기계 생산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는 대량의 시계 구성 부품을 정밀하게 제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계를 개발했으며, 현대적인 시계 산업의 길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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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시작해 1939년까지 이어진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스위스 시계 산업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1932년 한 해 동안 단 두 개의 시계만 생산한 오데마 피게는 다른 많은 회사와는 반대로 이 위기 속에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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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견고한 현대적 메인 스프링의 수명은 근본적으로는 무한하다. 이론적으로 보면 낡은 무브먼트에서 메인 스프링을 떼어내 다른 무브먼트에 이식해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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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무브먼트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한 번에 10억분의 1마력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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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 산토스 모델은 1904년 손목시계가 회중시계의 디자인을 벗어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로써 산토스는 생산을 중단한 적 없이 가장 오랫동안 시장에 존재하는 손목시계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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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렉스 설립자인 한스 빌스도르프의 두 번째 부인은 항상 데이트저스트 시계의 날짜창이 읽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그런 어느 날 빌스도르프는 오랫동안 목욕을 하다가 진정한 ‘유레카’를 경험한다. 물방울 하나가 오이스터 시계의 글라스 위 날짜창 부분에 튄 것이다. 롤렉스의 사이클롭스 렌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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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스가 엘 프리메로 크로노그래프 모델을 부활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배신자였던 워치메이커 찰리 베르모 덕분이었다. 그는 엘 프리메로 크로노그래프의 부품과 공구를 몰래 다락방에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에벨의 소유자인 피에르 알랭 블룸에 있다. 그는 1981년부터 에벨의 성공적인 크로노그래프 ‘보(Beau)’를 위해 엘 프리메로 재고를 사용했는데, 제니스가 이에 자극 받아 다시 생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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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네라이의 초기 모델 라디오미르는 롤렉스의 핸드와인딩 무브먼트와 오이스터 케이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착용자들이 종종 태엽을 감은 후 크라운을 잠그는 것을 잊곤 했다. 루미노르 모델에 1956년에 특허 등록한 크라운 가드를 장착한 뒤로, 그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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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브먼트 제조업체인 밸주는 대량 생산 방식을 도입하고 2년이 지난 1975년 전설적인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7750의 생산을 중지했다. 연간 약 10만 개를 생산했지만 상업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7750의 부활은 ETA가 밸주를 인수한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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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그래프 수직 클러치는 생각보다 더 오래되었다. 그 역사는 1885년 워치메이커앙리 알프레드 루그린과 함께 시작한다. 그는 세밀한 톱니가 있는 콘 모양의 베벨 기어를 사용했다. 1936년에는 비엘의 시계 제조 업체인 피어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은 13리뉴(약 28.6mm)의 칼리버 130의 수직 클러치 구동 플레이트에 작은 경화 고무 링을 삽입했다. 현대적인 방법의 선구자는 세이코다. 1969년 선보인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6139에 지금도 자주 사용하는 방식인 집게 달린 수직 클러치를 장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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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스위스 시계 브랜드와 달리 지라드 페리고는 자체적인 쿼츠 개발 능력을 과시했다. 독점 칼리버 GP 350은 지금도 널리 쓰이는 32,768Hz의 쿼츠 산업 표준을 세웠다. 칼리버 GP 350을 탑재한 GP 쿼츠 모델은 1971년 바젤 시계 박람회에서 첫선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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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소개한 호이어의 디지털 크로노그래프 크로노스플릿은 트랜지스터를 장착하고 그때까지 어떤 시계도 이루지 못한 99.9989%의 정확도를 기록했다. 뉴욕 티파니 부티크에서 600달러에 판매한 이 시계의 초기 구매자 중 한 명은 영화배우 폴 뉴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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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슈 홀딩 회사에 속했던 ETA의 가장 성공적인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는 2789와 2789-1이었다. ETA는 첫 번째 무브먼트인 2789를 1971년에서 1976년 사이 600만 개가 넘게 생산했다. 심지어 2789를 개선한 버전인 2789-1의 경우, 1976년에서 1982년 사이 1240만 개나 생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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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을 누르면 다이얼이 양쪽으로 열리며 크로노그래프가 작동하는 몽블랑의 메타모포시스는 자동차가 로봇으로, 또 로봇이 자동차로 변신하는 영화 <트랜스포머>(2007)에서 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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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7월 6일 한스 빌스도르프가 죽고 롤렉스가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한 앙드레 하이니거는 빌스도르프의 미망인을 롤렉스에서 축출했다. 이로써 롤렉스에서 과거의 권력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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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가장 큰 공용 시계는 1928년 브란덴부르크 주의 비텐베르게 도시의 재봉틀 공장 시계탑이다. 지름은 7.75m, 시침의 길이는 2.25m, 그리고 분침의 길이는 3.03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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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기계식 진자 시계는 스위스 루체른의 워치메이커 프레디 쥐에스가 만들었다. 그 시계는 총 150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졌으며 두께는 9.9mm, 무게는 겨우 1.6g이다. 1989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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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호이어는 2017년에 이미 호이어 02 투르비용 칼리버에 대한 3000번째 크로노미터 인증서를 받았다. 투르비용의 영역에서 이 칼리버는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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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긴 파워리저브를 지닌 기계식 시계는 독일 튀빙엔의 인근 도시 하이거로흐에 있는 마티아스 네쉬케에서 제작했다. 4개의 추가 달린 2.2m 높이의 시계는 쉬지 않고 약 3750일 동안 작동한다. 대략 10년이 지나야 비로소 동력 공급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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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얇은 핸드와인딩 무브먼트는 제네바의 장 라살에서 생산했다. 1978년에 소개한 칼리버 1200의 지름은 20.4mm, 두께는 1.2mm에 불과했다. 여기서 계산한 전체 부피는 397세제곱밀리미터다. 이 무브먼트에는 스톤 9개, 그리고 아주 작은 볼 베어링 14개를 장착했다. 밸런스의 진동수는 21,600vph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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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선보인 IWC 인제니어 Ref. 3508, 3518, 9238, 그리고 9258의 항자력은 50만 암페어에 달했다. IWC는 이 모델들을 1500개 이하로만 생산했다. 흥미로운 점은 ETA 2892-A2 수정 버전에 장착한 특수 헤어스프링에 대한 것이다. 이 헤어스프링에 쓰인 값비싼 재료의 합성 방법에 대해 현재 IWC에서도, 그리고 헤어스프링 전문 제조업체인 니바록스에서도 자료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글
기스베르트 L. 브루너(Gisbert L. Brunner)
Editor
유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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