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을 동력으로 하여 작동하는 기계식 시계의 기본 구조는 19세기에 이미 완성됐다. 하지만 발전은 멈추지 않는다. 올해의 여러 신제품에서도 이런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능, 소재, 설계, 가공 기술을 통해 기계식 시계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태그호이어 모나코 에버그래프. 컴플라이언트 메커니즘을 통해 마찰과 마모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크로노그래프 구조의 해체
기계식 시계에서 사용자가 직접 명령을 내려 작동시키는 기능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크로노그래프,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미니트 리피터, 오토마통 정도가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컴플리케이션이 시각 정보를 통해 사용자와 연결된다면, 이
기능들은 손끝의 감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중에서도 크로노그래프는 푸시 버튼을 반복적으로 눌러
사용하는 구조상 조작감이 더욱 중요하게 드러난다.
과거에는 칼럼 휠의 유무가 고급 크로노그래프의 기준처럼 여겨졌다. 여러 개의 기둥 형태를 지닌 칼럼 휠은 가공 난도가 높았고, 작동감에서도
캠 방식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칼럼 휠이 회전하며 비교적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을 전달한다. 반면 캠 방식은 힘을 한 번 모았다가 ‘뚝’ 하고 풀어내듯 크로노그래프 핸드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차이는 손끝이 예민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2000년대 이후 칼럼 휠이 고급 크로노그래프의 표준에 가까운 부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제어 메커니즘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촉감의 우열은 예전만큼 두드러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레버와 스프링이 복잡하게 맞물리는 크로노그래프의 특성상 뛰어난 조작감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태그호이어가 선보인 모나코 에버그래프는 이 오래된 크로노그래프 설계에 다른 접근을 제시한
모델이다. 모나코 에버그래프에 탑재된 셀프와인딩 칼리버 TH80-00은
기존 기계식 크로노그래프의 핵심이었던 레버, 스프링, 칼럼
휠 중심 구조를 재편했다. 일반적인 크로노그래프는 푸시 버튼을 누르면 레버가 움직이고, 칼럼 휠이나 캠이 회전하거나 위치를 바꾸며 클러치를 연결한다. 정지와
리셋 과정에서는 스프링의 장력도 필수적이다. 이 구조는 100년
이상 검증되고 발전해왔지만, 수많은 부품이 서로 물리고 마찰하는 만큼 구조적인 한계도 분명했다. 지금까지의 개선 역시 대부분 휠과 기어의 형상을 다듬는 방식에 머물렀다. 칼리버 TH80-00은 이를 ‘컴플라이언트 메커니즘(Compliant
Mechanism)’으로 풀었다. 회전축이나 관절 같은 전통적인 부품 대신, 얇고 유연하면서도 탄성을 지닌 금속 구조물이 변형과 복원을 반복하며 기존 부품의 역할을 대신한다. 쉽게 말해 부품이 서로 맞물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탄성
구조물이 휘어졌다가 되돌아오며 명령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칼리버 TH80-00에는 두 개의
플렉서블 블레이드가 사용된다. 첫 번째 블레이드는 스타트와 스톱을 담당한다. 2시 방향 푸시 버튼을 누르면 얇은 탄성 블레이드가 휘면서 에너지를 축적한다.
설정된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블레이드는 반전 상태로 전환되고, 이 움직임이 크로노그래프
클러치를 작동시킨다. 다시 버튼을 누르면 반대 과정이 일어나며 크로노그래프가 멈춘다. 스타트와 스톱 과정에서 탄성 블레이드와 클러치가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칼럼 휠 같은 전통적인 제어 부품은 필요하지
않다.
두 번째 블레이드는 리셋을 담당한다. 기계식
크로노그래프는 해머가 하트 캠을 가격해 바늘을 원점으로 되돌린다. 칼리버 TH80-00 역시 기본 원리는 같지만, 해머 구조를 블레이드에 통합했다. 리셋 버튼을 누르는 힘이 블레이드에 축적되고,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저장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방출되며 하트 캠을 강하게 때린다. 리셋 과정에서 해머가 천천히 움직이거나
중간에 멈칫하면 바늘이 정확히 원점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반면 이 구조는 탄성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방출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리셋을 기대할 수 있다.
이 플렉서블 블레이드는 LIGA 공정으로 제작된다. LIGA는 반도체식 리소그래피와 전기주조를 결합한 미세가공 공정이다. 절삭으로 깎아내는 대신, 빛으로 만든 미세한 틀 안에 금속을 성장시켜 부품을 만든다. 덕분에 매우 작고 복잡한 형상을 높은 정밀도로 반복 생산할 수 있어, 현대 고급 시계의 이스케이프먼트와 특수 메커니즘 부품에 자주 쓰인다. 결과적으로 모나코 에버그래프의 구조는 부품 수와 마찰을 줄이면서도 즉각적이고 균일한 조작감을 구현한다. 사용자가 체감하는 변화도 분명하다. 푸시 버튼을 누르는 스트로크는 일정하고, 크로노그래프의 반응은 빠르다. 크로노그래프 조작에서 손끝의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보여주는 부분이다.

수직 클러치 하나와 수평 클러치 두 개가 쓰인 톤다 PF 크로노그래프 미스테리외 칼리버 PF053. 파르미지아니 톤다 PF 크로노그래프 미스테리외.
파르미지아니의 톤다 PF 크로노그래프 미스테리외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크로노그래프를 다시 생각한 모델이다. 이 시계는 크로노그래프처럼 보이지 않는 크로노그래프를 지향한다. 2025년 선보인 톤다 PF GMT 라트라팡테와도 같은 흐름에 있다. 기능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시침과 분침만 있는 타임 온리 워치처럼 보이지만, 버튼을 누르는 순간 숨어 있던 기능이 드러난다.
톤다 PF GMT 라트라팡테에서는
시침 아래에 감춰져 있던 금빛 듀얼타임 핸드가 라트라팡테처럼 분리된다. 톤다 PF 크로노그래프 미스테리외에서는 초침과 시·분침 아래에 숨어 있던 금빛 12시간
카운터와 60분 카운터가 순식간에 12시 방향으로 정렬된다. 기능을 쓰지 않을 때는 다이얼을 최대한 간결하게 유지하고, 필요할
때만 크로노그래프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톤다 PF 크로노그래프 미스테리외에는 세 개의 클러치가 사용됐다. 하나의 수직 클러치와 두 개의 수평 클러치다. 중앙에 모인 다섯 개의 바늘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분리되어야 하며, 다시 정확히 겹쳐져야 한다. 시간은 계속 흐르는 상태에서 크로노그래프 표시가 보이지 않는 상태와 보이는 상태를 자유롭게 오간다. 톤다 PF 크로노그래프 미스테리외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통해 가장 간결한 화면을 만든다. 크로노그래프 기술이 조작감뿐 아니라 표시 방식에서도 새롭게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발현이다.

오데마 피게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 퍼페추얼 캘린더. ‘올인원 크라운’을 통해 퍼페추얼 캘린더의 조작을 개선한 오데마 피게 칼리버
7138.
자유를 얻은 퍼페추얼 캘린더
캘린더 기능은 대개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일반적인 데이트 워치를 예로 들면, 날짜를 25일에 맞춰야 하는데 26일로 넘겨버렸을 경우 한 칸 뒤로 되돌릴 수 없다. 크라운을 계속 돌려 31일을 지나고, 다시 1일을 거쳐 25일로 돌아와야 한다. 데이데이트나 풀 캘린더도 기본 원리는 같다. 날짜, 요일, 월을 뒤로 돌리는 대신 한 바퀴를 다시 돌아 맞춰야 한다. 퍼페추얼 캘린더는 이 구조의 정점에 있는 기능이다. 시계가 계속 작동한다는 전제하에 사용자가 날짜를 수정할 필요가 없다. 30일과 31일인 달을 구분하고, 윤년의 2월 29일까지 기계적으로 계산해 표시하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프로그램된 메커니즘이 날짜, 요일, 월, 윤년 정보를 스스로 이어간다. 문제는 시계가 멈췄을 때다. 멈춘 지 2~3일 정도라면 시간 조정 포지션에서 크라운을 돌려 캘린더를 다시 맞출 수 있다. 하지만 몇 주, 몇 달 동안 멈춰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케이스 측면의 코렉터를 눌러 날짜, 요일, 월, 문페이즈, 윤년 표시를 각각 조정해야 한다. 각 정보가 서로 연동되는 부분도 있고, 따로 움직이는 부분도 있어 매뉴얼에 맞춰 정해진 순서대로 조작해야 한다. 코렉터를 누르는 조정 핀도 따로 보관해야 한다. 조작 금지 시간대, 이른바 레드존도 일반 데이트 워치보다 넓다. 이 구간에서 무리하게 조정하면 캘린더 메커니즘에 부담이 갈 수 있다. 퍼페추얼 캘린더를 구입하는 사용자는 대개 컴플리케이션에 대한 이해가 있는 편이지만, 처음부터 고급 시계를 선택하는 입문자도 적지 않다. 이 경우 복잡한 조작법은 높은 진입 장벽이 된다. 조작 순서를 잘못 이해하면 캘린더 표시가 서로 어긋날 수도 있다. 퍼페추얼 캘린더는 고장이 나면 본사 서비스 센터로 보내 수리하는 경우가 많아 시간과 비용 부담도 크다. 최고급 캘린더 기능을 누리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불편이다. 이 때문에 퍼페추얼 캘린더의 조작 편의성은 오랫동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었다. 기능의 완성도만큼 사용법의 간결함이 중요해진 최근 흐름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이전에도 조작 방식을 개선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캘린더 기능 전체를 자유롭게 통제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오데마 피게가 2025년 공개한 칼리버 7138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접근한 사례다. 캘린더 기능을 담당하는 다층 구조를 압축해 하나의 레이어로 통합하고, 케이스 측면의 코렉터 대신 크라운으로 각 캘린더 정보를 선택해 조정할 수 있는 ‘올인원(All-in-One)’ 크라운을 채택했다. 기존에는 조정 핀으로 개별 캘린더 정보를 바꿔야 했다면, 칼리버 7138에서는 크라운 포지션과 회전 조작으로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무엇보다 날짜를 뒤로 돌릴 수 있어 퍼페추얼 캘린더 조작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다만 구조의 큰 틀에서 보면 칼리버 7138은 전통적인 퍼페추얼 캘린더의 계보를 유지한다. 크라운 포지션에 따라 각 캘린더 정보가 연결되거나 분리되도록 설계했지만, 48개월 휠과 그랑 레버를 기반으로 한 하이브리드 구조에 가깝다.

날짜를 앞뒤로 조정할 수 있는 IWC 퍼페추얼 캘린더 프로셋 칼리버 82665. IWC 빅 파일럿 워치 퍼페추얼 캘린더 프로셋 어린 왕자.
IWC가 선보인 퍼페추얼 캘린더 프로셋(ProSet®)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기존 퍼페추얼 캘린더에서 쓰이던 48개월 휠 대신, 31개의 톱니와 12개의 홈을 지닌 디스크로 구성된 멀티 레이어
휠을 사용한다. 데이트 휠과 먼스 휠을 통합한 새로운 구조에 LIGA
공정으로 완성한 정밀한 휠을 결합해 퍼페추얼 캘린더를 구현한 것이다. 이 구조의 가장 큰
변화는 레버와 스프링을 줄이고, 전통적인 퍼페추얼 캘린더의 핵심 부품인 그랑 레버를 제거했다는 점이다. 그랑 레버는 여러 캘린더 정보를 통제하는 중요한 부품이지만, 날짜를
뒤로 조정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 제약이기도 했다. IWC는 이 부품을 없애며 날짜를 앞뒤로 조정할
수 있는 양방향 구조를 완성했다. 그 결과 퍼페추얼 캘린더는 훨씬 자유로운 기능이 되었다. 사용자는 더 이상 한 방향으로만 날짜를 넘기거나, 코렉터와 조정
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복잡한 캘린더 메커니즘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작 방식은 한층 직관적으로
바뀌었다. 퍼페추얼 캘린더의 발전은 이제 정확한 계산 능력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용자가 그 복잡함을 얼마나 쉽게 다룰 수 있는지도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반클리프 아펠 미드나잇 데이 앤 나이트 페이즈 드 룬. 다이얼의 지평선을 기준으로 낮밤 인디케이터가
회전한다.
해와 달의 공존
시계에서 달은 해보다 훨씬 강한 존재감을 갖는다. 문페이즈는 풀 캘린더와 퍼페추얼 캘린더 같은 복잡한 캘린더 기능과 짝을 이루고, 여성용 시계에서는 다이얼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장치로 쓰인다. 작은
문페이즈 창 하나만으로도 다이얼의 인상이 달라질 만큼 시각적 효과가 크다. 반면 해가 시계에서 직접적으로
부각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체계 자체는 태양을 기준으로 하지만, 기능으로 구현될 때는 대개 낮밤 인디케이터 정도에 머문다. 최근에는
낮밤 인디케이터도 실용적 기능보다 미적 효과를 위해 활용되는 경우가 늘었다. 문페이즈처럼 다이얼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더하는 장식적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랑에 운트 죄네가 2007년 선보인 랑에 1 문페이즈는 문페이즈와 낮밤 인디케이터를
하나의 공간에 담은 대표적인 사례다. 낮을 뜻하는 푸른 하늘과 밤을 뜻하는 어두운 하늘을 절반씩 배치한
투명 디스크를 문페이즈 위에 올렸다. 이를 통해 하나의 디스플레이 안에서 해가 지배하는 낮과 달이 떠오르는
밤을 함께 보여줬다. 이 아이디어는 2009년 제니스 크로노마스터
오픈 그랜드 데이트 & 선 페이즈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문페이즈와 낮밤 인디케이터가 겹친다는 점은 같지만, 표현은 훨씬 직접적이다. 랑에 운트 죄네가 하늘의 명암으로 낮과 밤을 구분했다면, 제니스는
해를 직접 등장시켜 낮을 표시했다. 실제 하늘처럼 낮에도 달이 보이는 장면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계의 디스크 안에서 해와 달은 대등한 존재로 나란히 등장한다.
반클리프 아펠의 미드나잇 데이 앤 나이트 페이즈 드 룬은 문페이즈와 낮밤 인디케이터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인 모델이다. 앞선 두 모델이 두 기능을 하나의 표시 안에 겹쳐놓았다면, 이 시계는 문페이즈와 낮밤 인디케이터 자체를 다이얼의 중심에 세운다. 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용자가 원할 때 문페이즈를 직접 호출할 수 있도록 온디맨드 기능까지 더했다. 다이얼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형 낮밤 인디케이터는 낮과 밤을 나누고, 그 안에 해와 달을 배치한다. 문페이즈는 별도의 창이나 인디케이터로 분리되지 않는다. 낮밤 인디케이터 안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다. 해가 보이는 시점에 케이스 7시 방향의 버튼을 누르면 디스크가 약 10초에 걸쳐 360도 회전하며 현재 달의 위상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24시간에 한 바퀴 도는 낮밤 표시와 29.5일 주기로 움직이는 문페이즈를 두 개의 디퍼렌셜(differential)로 연결했다. 디퍼렌셜은 서로 다른 움직임을 조율하는 기어 장치다. 자동차의 차동 기어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낮밤 인디케이터와 문페이즈는 하나의 디스플레이 안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약 10초 동안 360° 회전하는 대형 디스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소재 선택에도 신경 썼다. 항공용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하고 일부를 타공해 무게와 관성을 낮췄다. 덕분에 온디맨드 작동은 안정적으로 이뤄진다. 문페이즈와 낮밤 인디케이터는 흔히 정적인 감상용 기능으로 여겨진다. 반클리프 아펠은 이 두 기능을 하나의 장면 안에 결합하고, 사용자가 직접 움직여볼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 확장했다. 4년에 걸친 개발 기간은 이 시계가 단지 아름다운 다이얼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루이 비통 에스칼 트윈 존 다이얼에 핸드를 설치하는 모습. 루이 비통 에스칼 트윈 존.
듀얼타임의 마지막 퍼즐
GMT 기능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그중 듀얼타임은 보통 홈 타임을
표시하기 위해 12시간 표시와 낮밤 표시를 조합하거나, 24시간
표시를 사용한다. 12시간 방식의 경우 시침과 같은 디자인의 스켈레톤 핸드를 하나 더 얹거나, 별도의 작은 공간에 듀얼타임 핸드를 배치한다. 24시간 방식 역시
별도의 인디케이터를 쓰는 경우가 많고, 모델에 따라 점핑 아워 같은 디지털 표시를 사용하기도 한다.
가장 전통적인 듀얼타임 구성은 시침과 같은 형태의 스켈레톤 핸드에 낮밤 표시를
더한 방식이다. 듀얼타임을 사용하지 않을 때 두 개의 시침을 겹쳐 놓으면 다이얼이 훨씬 정돈되어 보인다. 반대로 예거 르쿨트르 마스터 컨트롤 지오그래픽이나 랑에 운트 죄네 랑에 1 타임
존처럼 별도의 공간에 12시간과 낮밤 인디케이터를 배치하고, 여기에
도시명을 연결하는 방식도 있다. 월드타이머의 요소를 일부 가져왔지만,
기능의 본질은 듀얼타임에 가깝다.
이 두 모델은 듀얼타임에도 분침을 갖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GMT 워치와 다르다. 다만 이때의 분침은 대체로 로컬 타임의 분침과
동기화된다. 홈 타임을 더 완전한 시간 표시로 보여주고, 로컬
타임과 시각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설계로 볼 수 있다.
루이비통 에스칼 트윈 존은 이 구성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중앙 축에 두 쌍의 시침과 분침, 즉 총 네 개의 바늘을 배치했다. 겉으로는 스켈레톤 시침과 낮밤 표시를 조합한 정통 듀얼타임 워치처럼 보이지만,
실제 구조는 훨씬 복잡하다. 특히 스켈레톤 분침은 단순히 다이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장식적
요소가 아니다. 에스칼 트윈 존의 스켈레톤 분침은 15분
단위로 조정할 수 있다. 표준 시간대에서 벗어난 오프셋 타임존을 위해서다. 일반적인 GMT 워치는 전 세계를
24개의 정시 단위 시간대로 나눈 표준 구조를 따른다. 하지만 실제 시간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UTC+3:30을 사용하는 이란, 30분 단위 시간대를
사용하는 인도, 45분 오프셋을 사용하는 네팔처럼 정시 단위로 맞출 수 없는 지역이 존재한다.
기존 GMT 워치는 이런 지역에 완벽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시침은 조정할 수 있어도 분 단위 오프셋을 따로 맞출 수 없다. 에스칼 트윈 존은 여기에 15분 단위로 조정되는 독립 분침을 더해
기존 듀얼타임의 사각지대를 보완했다. 그 결과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시간대에 대응할 수 있는 실용적인
듀얼타임 워치로 완성됐다. 듀얼타임 기능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빈틈을 채운 셈이다.
중력에 저항하는 방법
투르비용과 카루셀은 모두 중력 오차를 줄이기 위해 태어났다. 투르비용은 1801년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특허를 받은 장치다. 포켓 워치가 주머니 속에서 수직 자세로 오래 머무를 때 생기는 중력 오차를 줄이기 위해 고안됐다. 밸런스와 이스케이프먼트를 하나의 케이지 안에 넣고, 이 케이지를
일정한 속도로 회전시켜 특정 자세에서 생기는 오차를 평균화하는 방식이다. 투르비용에서는 고정 휠을 중심으로
케이지와 이스케이프먼트가 하나의 동력 흐름 안에서 맞물려 작동한다.
카루셀은 1892년 덴마크 출신 워치메이커
바네 보닉센이 고안했다. 목적은 투르비용과 같았다. 밸런스와
이스케이프먼트를 회전시켜 중력 오차를 평균화하는 것이다. 다만 구조가 다르다. 카루셀은 투르비용처럼 고정 휠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두 개의
기어 트레인을 통해 하나는 이스케이프먼트에 동력을 전달하고, 다른 하나는 캐리지의 회전 속도를 제어한다. 카루셀은 투르비용보다 실용적인 대안으로 출발했지만, 하이엔드 워치메이킹의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구조적 차이는 분명했지만 제작과 조정이 결코 간단하지 않았고, 투르비용이 이미 고급 조속 장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2008년
블랑팡이 흐름을 바꿨다. 세계 최초의 1분 플라잉 카루셀을
손목시계로 구현한 것이다. 이후 카루셀은 투르비용의 대체재가 아니라,
중력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독립적인 메커니즘으로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다.
현대의 하이엔드 워치메이킹에서 투르비용은 회전 케이지 그 이상이다. 축을 기울이고, 회전 방향을 나누고, 여러 케이지를 겹치며 중력에 대응하는 방식도 한층 복잡해졌다. 율리스
나르당과 예거 르쿨트르는 올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과제를 풀었다.

율리스 나르당 슈퍼 프릭.
율리스 나르당 슈퍼 프릭은 프릭(Freak) 시리즈 25년의 기술을 집약한 모델이다. 총 511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이 시계는 타임 온리 워치라는 범주 안에서 극도로 복잡한 구조를 보여준다. 핵심은 두 개의 경사진 투르비용이다. 대칭으로 배치된 두 투르비용은 각각 10°씩 기울어져 있으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 두 투르비용의 움직임은 세계 최초의 초소형 수직 디퍼렌셜을 거쳐 평균값으로 통합되고, 그 결과가 시간 표시로 이어진다.
슈퍼 프릭은 프릭 시리즈 최초로 초 단위 표시도 구현했다. 초침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짐벌 역할을 하는 유니버설
조인트를 거쳐 실린더형 초침을 구동한다. 모든 구성 요소를 지탱하는 티타늄 구조물 자체가 하나의 카루셀이다. 이 구조물은 60분에 한 바퀴 회전하며 거대한 분침 역할까지 맡는다. 두 개의 경사진 투르비용, 평균값을 산출하는 수직 디퍼렌셜, 60분 카루셀이 한데 맞물리며 슈퍼 프릭은 중력 보정 방식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예거 르쿨트르 히브리스 인벤티바 자이로투르비옹 아 스트라토스페르. 자이로투르비옹 케이지.
예거 르쿨트르 마스터 히브리스 인벤티바 자이로투르비옹 아 스트라토스페르는 자이로투르비옹의
최신 진화형이다. 자이로투르비옹은 2축에서 출발해 3축 구조로 발전하며 점점 더 입체적인 궤적을 그려왔다. 목표는 분명하다. 시계가 어떤 자세에 놓이더라도 케이지가 최대한 다양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중력의 영향을 빠르게 분산하는 것이다.
이 모델에 탑재된 자이로투르비옹 케이지는
189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졌지만 무게는 0.783g에 불과하다. 세 개의 티타늄 케이지는 각각 다른 속도로 회전한다. 내부 케이지는 20초, 중앙 케이지는 60초, 외부 케이지는 90초에 한 바퀴씩 돈다. 여기에 중력 저항성에 유리한 실린더형 헤어스프링을 조합했다.
그 결과 케이지는 거의 완전한 구체에 가까운 궤적을 그린다. 예거 르쿨트르는 이를 98%에 달하는 구형 궤적으로 설명한다. 슈퍼 프릭이 두 투르비용의 평균값과 카루셀 구조로 중력에 대응한다면, 마스터
히브리스 인벤티바 자이로투르비옹 아 스트라토스페르는 다축 회전과 초경량 케이지로 중력의 영향을 분산한다. 두
시계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투르비용의 현재 위치를 보여준다.
게재호
105호(07/08월호)
글
구교철
Editor
유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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