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티넘 러시
최근 몇 년간 세계 최대 고급 시계 박람회 워치스 앤 원더스에 플래티넘 모델이 상당히 많이 등장했다. 여러 고급 시계 브랜드들이 경쟁적으로 자사의 핵심 신제품을 플래티넘 케이스로 선보였다. 롤렉스는 2023년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 플래티넘 한정판을 선보였고, 올해는 새로운 랜드-드웰러 컬렉션을 출시하며 플래티넘 모델을 주요 옵션의 하나로 내세웠다. 파텍 필립 또한 플래티넘 활용에 적극적이다. 심지어 최신 칼라트라바 Ref. 6196P는 플래티넘 소재로 출시됐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올해 270주년 기념 라인업 중 하나인 트래디셔널 오픈 페이스 한정판을 모두 플래티넘으로 마련했고, 쇼파드는 스포츠 워치 컬렉션인 알파인 이글에 처음으로 플래티넘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 추세는 플래티넘이 현재 럭셔리 워치메이킹에서 가장 핫한 키워드임을 입증한다.
금 이후 ‘차세대 안전자산’
플래티넘 시계 열풍은 미학적 측면뿐 아니라 투자 재화로서의 매력 측면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최근 2년간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과 인플레이션 우려 등으로 대표 안전자산인 금값이 급등하자,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던 플래티넘이 제2의 안전자산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국제 금시세는 연초 대비 약 30% 가까이 상승하며 사상 최고 수준인 온스당 약 3,370달러(약 460만 원)선을 기록하고 있으며, 은 가격 또한 같은 기간 동안 20% 이상 오르며 온스당 30~32달러(약 4만 원) 안팎에서 거래되고 있다. 플래티넘은 2025년 6월 기준 온스당 약 1,348달러(약 180만 원)까지 오르며 10여 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연초 대비 30% 이상의 급등세다. 세계플래티넘투자협회(WPIC)에 따르면 금 가격 폭등의 영향으로 중국 시장에서 플래티넘 주얼리 수요가 급증한 것이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2025년 1분기 중국의 금 주얼리 판매는 전년 대비 32% 급감한 반면 플래티넘 주얼리는 26%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플래티넘이 산업 수요 외 투자 수요 측면에서 재조명되며 자금 유입이 활발해진 것이다. 이러한 투자 대체 수요의 증가는 플래티넘 가격의 가파른 상승세로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금 가격 급등이 투자자들을 플래티넘으로 이동시키고 있으며, 시계 주얼리 수요가 더해지며 플래티넘의 강세 기조가 유지될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플래티넘의 공급 제약과 투자 수요는 이런 추세에 더욱 불을 붙일 전망이다. 플래티넘은 실제로 2023년부터 생산성 저하 및 공급 차질로 만성적인 부족을 겪고 있다. 2025년에는 약 96만 온스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공급 적자가 예상된다는 전망도 나와 있다.
플래티넘이 투자자들의 안전자산 목록에 포함되기 시작한 데에는 최근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적 충돌의 영향도 크다. 전통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금이 가장 주목받지만, 이번 중동 리스크 국면에서는 금값이 이미 상당히 오른 상태라 플래티넘이 조명을 받았다.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당시 “플래티넘 가격이 단기간에 치솟으며 기술적 저항선(technical resistance level)을 돌파하자, 투자자와 단기 자금이 대거 유입되며 추가 상승세를 이끌었다”고 설명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중동 전쟁 리스크가 촉발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밑바탕에 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는 곧 플래티넘이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금의 대체재 혹은 보완재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는 에너지 및 원자재 시장의 불안을 야기해 플래티넘의 공급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플래티넘은 전 세계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러시아 등이 차지하지만, 중동 분쟁으로 인한 유가 상승과 물류 차질 등은 광물 자원의 채굴과 운송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2025년 중반 플래티넘 리스료(임대료) 금리가 급격히 올라 제련소들이 생산을 꺼리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시장에서 실물 플래티넘의 가용 재고가 부족함을 시사하는 지표였다. 이렇듯 공급 불안 심리까지 겹치면서 플래티넘이 안전한 실물자산으로 다시 한 번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플래티넘은 금과 달리 중앙은행들의 보유량이 적어 가격 변동성이 크다는 지적도 있지만, 희소성과 산업 수요를 겸비했기 때문에 오히려 향후 안전자산 지형에서 비중을 높일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플래티넘 시계의 영속적 가치
플래티넘 시계는 브랜드나 모델 단위의 희소성과 귀금속 자체의 희소성이라는 이중의 가치 방정식을 쓴다. 대다수의 고급 브랜드가 수량을 제한하거나 매년 생산량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플래티넘 시계의 희소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제한적 생산량이나 안전자산 성격만으로만 플래티넘 시계의 가치를 단정지을 수는 없다. 플래티넘 시계의 진정한 프리미엄은 귀금속 자체의 희소성보다 플래티넘을 다룰 수 있는 극소수 메종의 기술력에서 비롯된다.
순수 플래티넘(Pt 99.9%)은 약 55비커스로 18K 옐로 골드보다 낮으므로 시계 및 주얼리용으로는 Pt 950 합금이 사용된다. Pt 950 합금은 녹는점이 1768°C, 경도는 130~220비커스에 달한다. 18K 골드 대비 두 배 이상의 수치다. 따라서 케이스 및 브레이슬릿 가공부터 마무리 폴리싱까지 까다롭다. 이렇듯 플래티넘은 제조 난이도가 높고 소재 가격도 금보다 높지만, 고급 시계 브랜드들은 오히려 이를 차별화 요인으로 활용하고 있다. 플래티넘 시계를 최상위 등급으로 배치하고, 울트라 씬 무브먼트 또는 하이 컴플리케이션과 결합해 소재의 프리미엄을 기술의 프리미엄으로 연결하거나 하이엔드 피니싱으로 완성해 차별점을 명확히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플래티넘 시계 구매는 장인의 예술적 가치,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귀금속 자산에 대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입증하듯 최근 몇 년 사이 하이엔드 시계 수집가들과 투자자들 사이에서 플래티넘 소재 시계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시장 구조의 성숙이 자리한다. 팬데믹 시기 단기 차익을 노린 시계 투자 열풍이 진정되자, 장기적 가치와 희소성에 무게를 둔 진지한 컬렉터들이 시장의 주도권을 잡았다. 컬렉터의 눈이 더 예리해질수록, 그리고 2025년 이후에도 공급 리스크가 완화되지 않는 한, 플래티넘 시계는 컬렉터의 손목과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모두 빛을 낼 가능성이 크다.
게재호
99호(07/08월호)
Editor
유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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