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5mm가 만든 자유
블랑팡 레이디버드가 발표된 1950년대 중반에는 작은 다이얼과 장식을 강조한 주얼리 워치가 유행하고 있었다. 블랑팡은 이 흐름에 초소형 기계식 무브먼트라는 답을 제시했다. 지름은 불과 11.85mm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원형 기계식 무브먼트였다.
초기에는 18,000vph(2.5Hz)로 작동하는 칼리버 R52와 R520이 잠시 사용됐고, 곧 21,600vph(3Hz)의 R55와 R550으로 대체됐다. R55는 일반적인 3시 방향 크라운을 적용했고 R550은 크라운이 케이스백에 배치됐다. 작게 만드는 과정에서 기능을 덜어내지도 않았다. 블랑팡은 기존 초소형 무브먼트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던 동력 전달과 내구성을 해결하기 위해 기어 트레인에 휠 하나를 더했다. 언뜻 쉬워 보이지만, 회전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결코 단순하지 않다. 블랑팡은 이스케이프먼트의 작동 방향도 반대로 설계하며 문제를 해결했다. 밸런스에는 충격 방지 장치도 적용됐다. R55와 R550의 진동수는 21,600vph였고, 지름 11.85mm임에도 40시간 이상의 파워 리저브를 확보했다. 핸드와인딩 방식을 감안해도 뛰어난 스펙이었다.
무브먼트의 소형화는 곧 디자인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레이디버드는 전통적인 손목시계뿐 아니라 브레이슬릿, 커프, 뱅글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됐다. 스트랩을 케이스 뒤쪽의 슬롯으로 통과시키는 ‘불릿(Bullet)’ 버전도 등장했다. 별도의 러그 없이 스트랩을 빠르게 교체할 수 있는 구조였다.
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에 탑재되는 칼리버 615.
70년 후
2026년 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에는 셀프와인딩 칼리버 615가 탑재된다. 블랑팡은 1990년대부터 이 초소형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를 여성시계에 활용해왔다. 현재 판매 중인 레이디버드 울트라플레이트에도 같은 칼리버가 쓰인다.
칼리버 615는 지름 15.7mm, 두께 3.9mm이며 180개 부품과 29개 주얼로 이뤄진다. 진동수는 21,600vph, 파워 리저브는 38시간이다. 파워 리저브 성능은 무브먼트 크기에 비해 준수한 편이다.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도 적용해 항자성도 확보했다. 크기는 1956년의 R55보다 크다. 70년이라는 시간만 본다면 의외지만 두 무브먼트는 조건이 다르다. 과거의 R55 계열이 핸드와인딩인 반면, 칼리버 615에는 로터와 셀프와인딩 기구가 함께 들어간다.
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는 1956년의 초소형 기록에 다시 도전한 시계가 아니다. 방향은 오히려 그 반대다. 1956년 블랑팡이 초소형 기계식 무브먼트로 확보한 디자인의 자유를 오늘날의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로 재구현했다. 작은 여성시계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첫 번째 레이디버드의 취지도 현대적으로 구현된 셈이다.


버블폼
시계의 프로파일은 상당히 독특하다. 레이디 B의 케이스 지름은 19mm지만 두께는 13.2mm다. 일반적인 비례로 보면 매우 두껍다. 그러나 옆에서 보면 이유가 드러난다. 케이스를 얇은 원통으로 처리하지 않고 위아래가 둥글게 이어지는 입체적인 형태로 설계했다. 블랑팡은 ‘버블폼(Bubble Form)’이라 부른다. 이같은 모습은 1950년대 중후반 산업디자인의 흐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에로 사리넨의 튤립 체어와 아르네 야콥센의 에그 체어처럼 가구에서는 유기적인 곡면과 일체형 실루엣이 등장했고, 1955년 시트로엥 DS는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유선형 차체로 미래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1958년 브뤼셀 세계박람회의 아토미움 역시 거대한 구체를 전면에 내세웠다. 당시 산업디자인과 건축 전반에서 직선보다 곡면, 평면보다 입체적인 볼륨을 강조하는 조형이 두드러졌다. 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는 이런 시대적 조형을 재해석했다. 1950년대 특유의 둥근 곡면과 입체적 볼륨을 이어받되, 지름 19mm의 케이스와 러그를 생략한 구조, 그리고 더블 투어 스트랩을 통해 새로운 실루엣으로 제안한다. 오히려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간결한 외형을 구현하는 구조는 복잡하다. 블랑팡에 따르면 케이스 설계에 필요한 기술 도면만 30장이 넘는다. 상부와 하부로 구성한 케이스 안에는 셀프와인딩 무브먼트가 작동할 공간을 확보하면서도 외부에서는 두 파트의 경계가 두드러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케이스백을 베젤보다 작게 설계하고 접합부와 곡면 전체를 폴리싱해 하나의 덩어리처럼 이어지도록 만든 이유다.
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에서는 러그도 사라졌다. 스트랩은 케이스 내부에 가공한 폭 10mm, 높이 1.6mm의 통로를 직접 지난다. 내부를 마이크로 블래스트 처리해 가죽 스트랩이 움직일 때의 마찰을 적당한 수준으로 맞췄다. 덕분에 더블 투어 스트랩 위에서 둥근 케이스는 안정적으로 자리한다. 지나치게 걸리는 느낌도, 지나치게 미끄러운 느낌도 없다. 구조적으로는 과거 레이디버드 ‘불릿’의 스트랩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케이스 밖으로 러그가 돌출되지 않기 때문에 둥근 실루엣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동일하다.
스트랩은 손목을 두 바퀴 감는 더블 투어 방식이며 총 여섯 가지 컬러로 마련했다. 시계의 작은 케이스만 보면 극도로 미니멀하지만, 손목에 올리면 더블 투어 스트랩까지 하나의 디자인으로 작용한다.

다이아몬드 없는 주얼리 워치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보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블랑팡은 오랜 시간 여성용 주얼리 워치를 만들어왔지만, 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에는 다이아몬드도 자개도 없다. 오팔린 다이얼에 골드 인덱스와 시·분침만 배치했다.


대신 소재와 마감 자체를 장식으로 활용했다. 각각의 인덱스는 1.82×0.39mm에 불과하지만 윗면과 측면을 모두 폴리싱했고, 다이얼 가장자리를 감싸는 르호(플린지) 역시 미러 폴리싱으로 마감했다. 둥글게 솟은 골드 케이스와 담백한 오팔린 다이얼 속에서 빛을 다각도에서 반사시키는 르호와 인덱스의 모습은 만개한 꽃처럼 화려하다보다 꽃봉오리처럼 우아하다.
이 시계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작은 여성용 시계는 주얼리 워치와 거의 동의어처럼 다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크기가 작아지면 다이아몬드를 세팅하고 자개 다이얼을 넣거나 브레이슬릿 자체를 장신구처럼 만드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는 그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다이얼과 정교한 마감 덕분에 지적이고 차분한 인상이 강하다.
진정한 자유
현재 고급 여성시계에서 지름 20mm 안팎의 작은 크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로폭이 18.5mm에 이르는 쿼츠 시계도 존재한다. 그러나 셀프와인딩 기계식 시계로 범위를 좁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표적인 현행 여성용 기계식 시계는 대체로 지름 28~36mm에 걸쳐 있다. 지름 19mm에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를 넣은 여성시계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의 의미는 여기에서 더 분명해진다. 이 시계가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작아서가 아니다. 아주 작은 시계를 원하지만 쿼츠는 원하지 않는 사람, 기계식 시계를 좋아하지만 지름 30mm 이상의 케이스는 부담스러운 사람, 그리고 여성시계를 고르면서도 다이아몬드나 자개 같은 전형적인 장식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참신한 선택지를 제시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블랑팡이 ‘여성적’이라는 개념을 화려함이나 장식으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블랑팡 레이디버드 레이디 B는 다이아몬드 없이도 우아하고, 작지만 장난스럽지 않으며, 기계식 시계로서도 충분히 흥미롭다. 여성에게 어울리는 시계에 정답은 없다. 블랑팡은 여성에게 어떤 시계가 어울리는 규정하기보다, 여성 스스로 자신의 취향에 답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