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IWC는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한 인제니어 SL Ref. 1832를 선보였다. 골드 워치가 럭셔리의 기준이던 시대에 스테인리스 스틸과 일체형 브레이슬릿을 택한 이 시계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인제니어 컬렉션의 뿌리로 남아 있다. IWC는 인제니어 SL 탄생 50주년을 맞아 젠타의 아내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였던 에블린 젠타와 딸 알렉시아 젠타를 만났다. 두 사람은 제랄드 젠타 헤리티지 협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들에게서 인제니어의 탄생 배경부터 젠타의 창작 방식, 쿼츠 위기 속에서 그가 택한 길, 아직 밝혀지지 않은 디자인을 추적하는 작업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1970년대 인제니어 SL의 브러시드 다이얼에서 영감을 얻은 두 기념 한정판 Ref. IW328910과 Ref. IW324909의 공개와 함께 진행됐다.
자료 및 인터뷰 출처 IWC

제랄드 젠타의 딸 알렉시아 젠타(왼쪽)와 알렉시아 젠타(오른쪽)
소개를 부탁한다.
에블린 젠타 나는 에블린 젠타다. 32년 동안 제랄드 젠타의 아내였고, 그와 더없이 멋진 삶을 살았다. 비즈니스에서도 흥미진진한 시간을 함께했으며 가는 길마다 모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 훌륭한 젊은 여성의 어머니다.
알렉시아 젠타 나는 알렉시아 젠타, 제랄드 젠타의 딸이다. 한쪽에는 거침없는 예술가가, 다른 한쪽에는 비즈니스 우먼이 있는 집에서 자라는 특별한 행운을 누렸다. 어머니와 함께 제랄드 젠타 헤리티지 협회를 설립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고 다음 세대에 영감을 주는 일에 큰 열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제니어 SL이 50년 뒤 아이콘으로 평가받는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나.
에블린 인제니어는 기술적인 시계로 출발했지만 예술가의 시선을 거치며 변모했다. 세상 모두가 “당신이 디자인한 것은 좋지 않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때도 제랄드는 언제나 “두고 봐. 결국 따라오게 될 테니까”라고 답했다.
알렉시아 오늘날의 인제니어를 보며 아버지가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무척 만족스럽다. 그래서 이제 이 시계를 아이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에블린 사람들은 흔히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 인제니어를 ‘마법의 트리오’라고 말한다. 세 가지 시계는 저마다 아주 뚜렷한 개성을 지녔다. 제랄드가 지금 우리 곁에서 인제니어의 50주년을 함께 축하한다면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인제니어가 자신의 DNA를 간직했고 디자인이 진정으로 존중받았다는 사실을 반겼을 것이다. 더 나은 기술과 진보한 메커니즘이 적용된 점도 높이 평가했으리라 생각한다. 삶은 계속 움직이며, 제랄드는 무엇도 정체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시계에 담긴 DNA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봤을 것이다.
알렉시아 아버지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경쟁자를 살피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개의치도 않았다. 그저 자유롭게 창조하고 싶어 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이나 시장의 요구가 그의 생각에 끼어들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을 아버지가 직접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 아주 솔직하게 “내가 옳았어. 당신들은 처음부터 알아봤어야 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어떤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나. 또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나.
에블린 제랄드는 자신이 어떤 디자인 사조에 속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우선 그는 디자인을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시계 디자이너라는 직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한 인물은 열차 등을 디자인한 산업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였다. 그런 일을 자신도 해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계 디자이너’는 없었다. 남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시계도, 클록도, 시계와 관련된 어떤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예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피카소를 좋아했다. 피카소가 회화에 머물지 않고 접시와 의자까지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시계 디자인과 회화는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나.
알렉시아 아버지는 아침에는 시계를 디자인하고 오후에는 그림을 그렸다. 세월에 따라 변해간 디자인과 회화 사이에서 분명한 연관성을 볼 수 있다. 초기 디자인은 절제돼 있었고 대담함보다는 정제된 인상이 강했다. 당시에는 출발도 순탄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대담해졌고, 어머니를 만난 뒤에는 더 많은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남부로 옮겨가 푸른 하늘을 발견했고 형태도 한층 과감해졌다. 갈수록 자유롭고 화려해졌으며, 디자인과 회화 모두 더욱 추상적이고 생동감 있게 변했다. 시장의 요구나 경쟁자의 움직임이 이 변화를 이끈 것이 아니다. 자신이 머무는 환경에 영향을 받은 한 예술가의 변화였다. 아버지는 관찰력이 대단했다. 건물이나 공원에서 작은 디테일 하나를 발견하면 그 앞에 멈춰 서서 보통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는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디자인 과정 자체는 매우 단순했다. 아침 일찍 정장과 넥타이를 갖춰 입고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선 두 개를 그었다. 컴퍼스를 들고 디자인을 시작하면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시계 하나가 태어났다.

인제니어를 하나의 일체화된 형태로 구상한 이유는 무엇인가.
에블린 우선 그는 골드 워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하고 일체형 브레이슬릿을 만드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지금은 누구나 브레이슬릿을 케이스와 통합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원형이나 정사각형, 직사각형 케이스를 만든 뒤 스트랩이나 브레이슬릿을 달았다. 케이스를 디자인한 다음 브레이슬릿 제조업체를 찾아가 이미 만들어진 제품 가운데 하나를 골라 연결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잘못은 아니었다. 다만 브레이슬릿을 시계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인제니어를 맡았을 때 제랄드는 전체가 하나의 오브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제니어는 하나의 시계가 아니라 오브제였다. ‘인제니어’라는 이름과 성격에는 스테인리스 스틸이 훨씬 잘 어울렸다. 당시 스테인리스 스틸은 럭셔리 소재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는 이 시계를 럭셔리 제품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특히 인제니어에는 스테인리스 스틸이 올바른 소재라고 확신했다.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오늘날의 모습을 보라.
클라이언트와는 어떤 방식으로 일했나.
에블린 우리는 제랄드와 일대일 관계를 맺은 훌륭한 클라이언트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남편에게 자신의 모델을 수천 명이 사게 되리라고 생각했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대신 눈앞에 있는 사람이 시계를 사랑하고 다른 열정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는 IWC와 작업할 때 그랬듯 조금씩 그 사람과 그가 품은 열정의 DNA 안으로 들어가 함께 열정을 나눴다.
알렉시아 아버지는 언제나 자유를 찾았다. 그것이 그의 삶을 관통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자유든 창작의 자유든, 시간이 흘러 브랜드가 그를 더 신뢰할수록 자신을 더 많이 표현할 수 있었다. 작품의 변화에서도 그가 서서히 더 큰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이 보인다.
브랜드가 그의 디자인을 수정하려 하면 어떻게 반응했나.
에블린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그를 제한하려 한 브랜드도 있었다. “이 시계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아주 멋져요. 그런데 둥글게 만들었군요. 정사각형으로 바꾸죠”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제랄드는 “그렇게 잘 아시면 직접 하세요. 나 같은 사람은 필요 없겠군요”라고 말하고 회의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자신의 디자인이 제작에 들어가면 전 과정을 끝까지 따라갔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어떻게 구현할지 알고 싶어 했고, 일체형 시계의 제작 과정을 확인하려고 공장을 더 자주 찾았다. 머릿속에 완성된 형태가 있었고 손목에 잘 맞기를 원했다. 현장에서 제작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브레이슬릿과 케이스를 따로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계’ 하나를 놓고 이야기하기를 바랐다.
남편은 실제로 시계를 만드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다른 누구보다 그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무척 성가셔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름다운 시계는 스스로 말한다. 주변에 불필요한 말을 잔뜩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런 마케팅 문구는 오히려 진정성 없이 들린다. 시계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남편은 끝내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 나는 고객 대부분이 영어를 사용하니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그는 “그럴 필요 없어. 내 시계들이 스스로 말하니까”라고 답했다.
두 사람의 동반자 관계는 젠타의 작업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
알렉시아 아버지의 작품은 ‘마담 젠타 이전’과 ‘이후’로 분명하게 나뉜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진정으로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완성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었고,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협상하고 회사를 운영하며 단호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고 모든 일을 우아하게 처리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큰 영감을 받았다.
에블린 내가 남편의 본능을 통제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훨씬 합리적으로 일했고 삶도 훨씬 조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엄청난 창작 욕구 때문에 우리는 어느 면에서 ‘프로토타입 제조사’가 됐다. 생산량은 적었지만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남편이 새로운 시계를 떠올리고 크게 흥분하면 반드시 실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공장에 도착해 관계자들이 모이면 그는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해요. 이렇게 만들어주세요”라고 했다.
남편은 자신의 모든 디자인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제조할 수 없는 것을 그리는 제멋대로인 예술가가 아니었다. 보통 공장에서는 “젠타 씨, 지금 일이 밀려 있습니다”, “이것은 제작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그는 토론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원합니다”로 끝이었다. 때로는 진행 중인 일을 중간에 멈춰야 했다. 경영 컨설턴트가 우리 공장에 왔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을 모조리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시아 아버지는 디자인에서 철저히 본능적이었다. 회사를 경영해야 했던 어머니에게는 악몽이었을 것이다. 사업을 운영하려면 컬렉션을 체계적으로 구성해야 하고, 새로운 프로토타입만 계속 만들 수도 없다. 문제는 창의성의 부족이 아니라 거의 과잉에 가까운 창의성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아버지는 업계에 계속 도전하고 선구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었다.
완벽한 비례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일상에서도 드러났나.
알렉시아 아버지의 예술가적 면모와 관찰력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간단한 예가 있다. 호텔 조식 뷔페에서 접시 위에 음식을 어떻게 배치하느냐도 매우 중요했다. 완벽하게 담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사랑했고 시각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좋아했다. 매사에 디테일을 살폈다.
에블린 제랄드는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가 잘 차려입기를 바랐다. 함께 옷을 사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남자는 많지 않다. 물론 판매 직원에게 “이 드레스의 균형이 완벽하지 않다는 게 보이지 않나요? 이 부분은 이렇게 되어야 해요”라고 말해 그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직원은 속으로 ‘제발 이 남자가 좀 갔으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알렉시아의 말처럼 모든 것은 아름답고 균형이 맞아야 했다.
그의 성장 배경은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알렉시아 아버지의 삶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시각장애가 있었고 집에는 돈이 전혀 없었다. 그는 강한 부당함을 느끼며 자랐다. 내게 늘 “왜 나는 충분히 오래 학교에 다닐 수 없었을까? 왜 대학에 갈 수 없었을까? 왜, 왜, 왜?”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철저한 언더독(underdog)이었다. 가족 중 시계 제작자나 시계 디자이너는 한 명도 없었다. 삶은 정말 힘들었다. 열네 살 때는 방과 후 심부름을 하며 부모에게 가져다줄 돈을 조금씩 벌었다.
에블린 디자인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에서 얻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분노와 격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를 살든 해낼 수는 있다. 제랄드는 쿼츠 위기를 통과했다.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스위스 시계 산업은 붕괴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스위스 시계 산업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탰다는 점에서 제랄드가 지닌 역사적 중요성도 여기에 있다. 남편이 오늘날 ‘스포츠 시크’라고 부르는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탈리아 시장이 먼저 크게 호응했다. 그 결과 자신이 옳다는 확신도 더 강해졌다. 이탈리아 고객들은 언제나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 조금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시계라는 작은 물건의 제약은 예술가 젠타에게 어떤 의미였나.
에블린 제약을 말한다면 시계만큼 제약이 많은 분야도 없다. 시계는 작고, 반드시 작동해야 한다. 그것부터가 악몽이다. 정해진 너비와 높이도 있다. 모든 것이 제약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오후의 그림 작업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러한 제약 안에서도 예술가로 남는다면 오히려 더 뛰어난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이 작은 물건을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쿼츠 위기 속에서 그가 내놓은 해답은 무엇이었나.
에블린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로 돌아가보자. 제랄드는 스위스 라쇼드퐁, 르 로클, 라코토페를 돌아다니며 디자인을 한 점에 10스위스프랑(약 710원)씩 팔았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그의 디자인이 곳곳에 있다는 뜻이다. 어느 브랜드의 이름을 대더라도 제랄드 젠타의 디자인이 있을 것이다. 다만 브랜드도 모르고 우리도 모를 뿐이다. 1970년대가 오면서 쿼츠에 대한 공포가 닥쳤다. 일부 스위스 브랜드는 그것이 살길이라고 생각해 직접 쿼츠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브랜드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제랄드는 “우리가 할 줄 아는 것으로 돌아가자. 기계식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1970년대 말에는 이미 퍼페추얼 캘린더를 내놓았다. 물론 1930년대에도 퍼페추얼 캘린더는 존재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만들지 않았다. 그가 퍼페추얼 캘린더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달을 표시하는 저 미친 사람은 누구인가”라며 주목했다. 당시 젊은 세대에게 문페이즈와 퍼페추얼 캘린더는 낯선 것이었다. 2월 28일과 29일을 구분해 작동하는 모습을 보며 “이게 뭐지?”라고 했다.
다른 브랜드들이 이를 따라잡을 무렵 그는 미니트 리피터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여전히 퍼페추얼 캘린더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미니트 리피터를 따라오자 이번에는 당시 우리만 만들 수 있었던 그랑 소네리를 내놓았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레트로그레이드를 또 다른 방식으로 탐구했다. 그는 언제나 10년 앞서 있었다. 스위스 시계 산업에 공포가 닥쳤을 때 이미 해답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늘 몇 걸음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인제니어 역시 오늘날에도 유효한 시계라고 생각한다.
협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젠타의 디자인을 어떻게 확인하고 있나.
알렉시아 현재 각 브랜드의 아키비스트(archivist, 아카이브 담당자)와 대화하고 있다. 그들이 보유한 기록과 우리가 가진 디자인을 함께 살피며 어떤 시계를 아버지가 실제로 디자인했는지 확인한다. 이미 아버지의 작품이라고 강하게 의심하는 시계들이 있다. 어떤 것은 확실해 보인다. 아버지가 직접 디자인한 것은 아니지만 큰 영향을 받은 경우도 있다. 일종의 탐정 작업이다. 다행히 조사할 수 있는 훌륭한 아카이브가 남아 있다.
내가 세운 원칙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 세 곳을 통해 아버지가 특정 모델을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해당 브랜드도 동의해야 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IWC와 아버지는 훌륭한 협업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아직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최근 제랄드 젠타의 이름이 널리 언급되는 현상을 어떻게 보나.
알렉시아 아버지는 예술가였고, 일반적으로 예술가에게는 자의식이 따른다. 브랜드가 자신의 디자인에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상처받았다. 오늘날 자신이 실제로 만든 디자인에 공로를 인정받는 모습을 봤다면 무척 감동하고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이제는 반대로 아버지가 만들지 않은 디자인까지 그의 작품으로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실 이 모델은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도 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무엇인가.
알렉시아 안타깝게도 디자인 실력은 물려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내게 디자인을 가르치려 한 적도 있지만 10분 만에 끝났다. 두 사람이 모두 문을 쾅 닫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디자인 감각이 유전되는지, 가르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관찰하는 법을 가르쳤다.
아버지와 함께한 가장 오래된 기억 가운데 하나는 모나코의 작은 장미 정원을 걷던 일이다. 수천 송이의 장미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버지는 장미 한 송이 한 송이 앞에 멈춰 섰다. 우리는 꽃잎과 가시, 전체적인 배열까지 모두 살폈다.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솔직히 어린 나에게는 참을성이 부족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순간에 온전히 머물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가르쳤다. 지금 내가 시계와 예술에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돌아보면 분명 아버지의 취향을 물려받았다. 관찰하는 법을 그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매일 한 점이 넘는 새로운 시계 디자인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새로운 디자인과 그림을 날마다 보는 일이 우리 집에서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아버지는 이 업계와 쉽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업계에 도전할 사람도, 쿼츠 위기 속에서 기계식 시계 산업을 구할 사람도 그였다. 그는 언더독이자 예술가였고, 다른 모든 사람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워치메이킹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원본 영상은 IWC 공식 유튜브 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IWC 공식 인터뷰 영상은 진행자의 질문이 삭제된 편집본이다. 아래 질문은 영상 속 발언의 순서를 유지하면서 주제에 따라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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