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WC 인제니어 SL 50주년 기념 한정판

가장 위대한 실패의 50주년
  • 2026.09.15

    2026.09.15

  • By 편집부

역사에는 실패로만 치부되는 순간이 있다.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고 팔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당시의 주류 취향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비로소 사람들은 그 실패의 순간을 재발견하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보이지 않았던 가치가 진면목을 드러낸다. 인제니어 SL 50주년의 이야기다.

인제니어 50주년 기념 한정판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고흐의 강렬한 색채와 거칠고 두터운 붓질은 후기 인상주의를 상징하지만, 생전 단 한 점의 작품만 판매하고 세상을 떠났다. 르누아르 역시 젊은 시절에는 전통적인 미술계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당시 살롱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훗날, 인상주의가 자리잡으며 논란이 되었던 거장의 표현은 그제서야 위대한 독창성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두 거장의 사례는 실패와 위대함이 양극단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한다. 그저 익숙함과 달랐기 때문에 외면 받았던 작품이 시간이 흐른 뒤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다. 대중이 거장의 천재성을 이해하기까지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위대한 실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작품이 아닌 시대가 한계에 막혀 눈이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인류사의 위대한 거장들을 거론하며 감히 해도 좋을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시계에도 같은 사례가 있다. 바로 50주년을 맞이한 IWC의 인제니어 SL Ref. 1832다. 




 

인제니어 SL 50주년 기념 한정판은 IWC가 꼽는 가장 위대한 실패를 다시 조명하고자 한다. 현 인제니어 컬렉션의 시작점인 인제니어 SL Ref. 1832는 인제니어 Ref. 866을 잇는 모델로 탄생했다. IWC 박물관 관장이었던 데이비드 세이퍼(David Seyffer)에 따르면 인제니어를 완전히 현대화해야 할 필요성은 이미 1969년부터 인식되었다고 한다. 이는 IWC의 기록 보관소에서 화이트와 블루 다이얼을 가진 5개의 프로토타입 제작 지시가 담긴 ‘노이에 인제니어(Neue Ingenieur)’ 프로젝트가 확인되면서 드러났다. 하지만 이 디자인 프로젝트는 진척되지 못했고, 결국 외부에서 새로운 디자인을 찾기 시작했다. 

인제니어의 새 디자인을 위한 프로젝트는 1972년 북유럽 담당 세일즈맨으로 IWC에 입사한 하네스 판틀리(Hannes Pantli)에게 주어졌다. 이후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 그는 제품 원가를 낮추고 공장 가동률을 높여야 할 필요성을 빠르게 인식했다. 브레튼 우즈 체제의 종식으로 금값이 세 배 이상 폭등하면서 IWC의 수출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랄드 젠타
 

회사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있었던 관계로 새 인제니어의 디자인은 당시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독립 시계 디자이너였던 제랄드 젠타에게 맡겨졌다. 젠타는 같은 시기에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와 파텍 필립 노틸러스를 디자인하며 명성을 쌓고 있었다. 1973년 판틀리는 젠타를 만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시계는 일체형 브레이슬릿의 라운드 케이스이어야 하고, 셀프와인딩 칼리버 8541ES를 탑재해야 했다. 또한 이중 케이스 구조를 유지하면서 인제니어의 핵심인 항자성을 갖춰야 했다. 즉 외관은 새롭게 만들되 인제니어의 구조 자체는 건드리지 않아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로 인해 케이스는 지름 40mm, 두께는 12.5mm에 달했다. 당시 기준으로 크고 두꺼운 시계였기 때문에 ‘점보’라는 별명을 낳았다. 참고로 1983년 Ref. 1832의 후속 모델로 나온 Ref. 3505는 미드 사이드의 지름 34mm였기 때문에 ‘스키니 인제니어’로 불린다.


오리지널 인제니어 SL와 제랄드 젠타의 드로잉
 

80,000 A/m의 항자성 능력을 갖춘 인제니어 Ref. 1832는 엔지니어와 같은 기술직 종사자를 철저하게 타깃으로 삼았다. 젠타가 디자인한 인제니어는 라운드 케이스와 베젤에 5개의 홈을 지녔고, 일체형 브레이슬릿은 'H' 링크로 구성되었다. 각각의 링크는 입체적인 볼륨감을 띠었다. 지름 40mm와 두께 12.5mm의 크기 그리고 지나치게 대담한 디자인은 인제니어의 주된 타깃은 물론 대중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불과 598개가 생산된 제랄드 젠타의 인제니어는 상업적 결과로 본다면 실패였던 것이다.


제랄드 젠타는 생전에 이미 거장으로 불리며 시계 업계의 위대한 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그의 다른 대표작들이 일찍부터 주목받는 동안 인제니어는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대표작의 하나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2023년 IWC의 아카이브에서 젠타가 직접 그린 인제니어 SL의 원본 드로잉이 발견되었다. 최근 경매에서 오리지날 인제니어 SL은 2만~3만 달러(약 2600만~4000만원)에 낙찰되고 있다. 생산량이 극히 적고 IWC와 제랄드 젠타의 공동 서사가 있기 때문에 향후 낙찰가는 우상향이 예상된다.


현 인제니어 디자인의 근간이 되는 체스 보드 패턴 다이얼의 인제니어 SL Ref. 1832
 

현 인제니어 컬렉션의 디자인은 인제니어 SL Ref. 1832에 기반한다. 5개의 홈을 가진 베젤과 특유의 케이스 구조, 볼륨있는 일체형 브레이슬릿 형태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40mm 지름을 그대로 이어 받은 라인업과 Ref. 1832 이후의 미드사이즈 전개와 현재의 스몰 사이징을 따르는 35mm 지름의 셀프와인딩 라인업이다. 공통적으로 체스 보드를 연상시키는 정교한 패턴의 다이얼에 블랙, 블루, 실버 같은 전통적인 컬러에 청녹색 같은 모던한 컬러를 가미하고 있다. 케이스 소재는 오리지널의 스테인리스 스틸 외에 골드, 티타늄, 세라믹으로 다양성을 추구한다. 


인제니어 SL 50주년 기념 한정판과 유사한 다이얼의 오리지날 인제니어 SL
 


 

인제니어 SL 50주년 한정판 40mm Ref. IW328910



인제니어 SL 50주년 한정판 35mm Ref. IW324909
 

이번 인제니어 SL 50주년 기념 한정판은 현 컬렉션의 큰 틀을 공유한다. 특유의 디자인을 따르면서, 체스 보드 패턴 대신 브러시드 실버 도금 다이얼을 택했다. 이는 598개의 구성원이었던 또 다른 인제니어를 현대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또 하나의 포인트로는 50주년을 기념하는 숫자 50을 들 수 있다. 인제니어 고유의 번개 로고 아래에 자리한다. 

인제니어 SL 50주년 기념 한정판은 컬렉션과 마찬가지로 지름 40mm와 35mm로 생산된다. 공통적으로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를 탑재하나, 칼리버 넘버는 각각 32111과 47110로 다르다. 현행 컬렉션과 마찬가지로 지름 40mm 버전은 인제니어 전통의 솔리드백, 지름 35mm 버전은 금빛 로터의 칼리버 47110을 드러낸 글라스백 사양이다. 생산 수량은 각각 1,150개로 적지 않다. 수량만 놓고 보면 50년 전의 인제니어 SL과는 완전히 반대다. 당시에는 수년에 걸쳐 598개만 생산됐지만, 5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모델은 그 네 배에 가깝다. 이제는 인제니어가 과거의 실패가 아니라 위대한 실패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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