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한 팟캐스트 방송에 등장한 메타(Meta)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의 손목에는 의외의 시계가 있었다. 약 120달러(약 17만원)에 불과한 카시오 지샥이었다. 미국 코미디언 윌 페럴(John William Ferrell)은 작년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에서 벨벳 턱시도 차림에 타이맥스를 매치해 눈길을 끌었다. 고급 시계 수집가로 유명한 존 메이어와 애드 시런은 지샥 애호가로도 잘 알려졌다. 최근 SNS에서는 빈티지 세이코 워치와 키치한 브레이슬릿의 믹스매치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런 시계들을 단순히 '가성비'나 '입문용'이라 치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쿨함'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고급 시계는 오랫동안 재력과 위상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밀레니얼과 Z세대를 중심으로 가격만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문화에 대한 회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롤렉스나 파텍 필립을 소유하는 대신, "나는 과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편이 더 세련된 선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저가 시계를 선택하는 데에는 '나만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도 크게 작용한다. 소비자는 더 이상 단순히 '비싸야 좋은 것'이라는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착용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선택, 주변과 차별화되는 선택, 그리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선택을 선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나 살 수 있는 평범한 시계가 오히려 흔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이들을 매혹시킨다. 브랜드의 로고나 희소성보다는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시계를 착용하는 것, 이것이 '안티플렉스'의 핵심이다.
이 같은 흐름은 고급 시계 업계에도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지금까지 럭셔리 브랜드들은 희소성과 고가 전략, 그리고 인플레이션 방어라는 프레임을 통해 가치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안티플렉스'는 소비자들이 이제 "얼마짜리인가"가 아니라 "왜 이 브랜드인가"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브랜드의 철학, 기술, 디자인 스토리에 공감해야 비로소 소비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고급 시계 브랜드가 놓쳐서는 안 될 과제가 됐다. 절제된 시계에 대한 새로운 수요로 떠오른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역시 엄밀히 말하면 '안티플렉스'의 일환이다. '조용한 럭셔리'는 궁극적인 자기 만족으로 연결된다.
'안티플렉스'는 고급 시계를 부정하는 흐름이 아니다. 오히려 고급 시계를 왜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으로 이어진다. 고급 시계의 진정한 가치는 가격이나 로고에 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정밀함,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기술과 미감, 그리고 완성도 속에 존재한다. 예컨대 파텍 필립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시계"라는 슬로건으로 시간의 연속성을 말하고, 랑에 운트 죄네는 독일식 절제미와 확고한 페르소나를 통해 시간에 대한 철학을 전한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설립 270주년을 맞아 시간에 대한 관념을 재정의하기도 했다.
양극단은 경쟁하지 않는다. 고급 시계와 저가 시계는 서로 다른 맥락으로 존재하며, 시계 문화의 스펙트럼을 더욱 풍요롭고 입체적으로 넓힌다. 더 나아가 '안티플렉스'는 시계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고급 시계를 다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도 포함된다. 모든 시계가 저마다의 이야기로 빛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시계의 시간이다.
게재호
101호(11/12월호)
Editor
유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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