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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르트 랑(GERD R. LANG)

    워치메이커

    1944년~, 독일 출생

    기계식 시계 부활에 기여한 크로노스위스 창립자



     

    어릴 적부터 빈티지 재규어에 푹 빠졌을 정도로 기계에 관심을 보인 게르트 랑은 대학 진학 대신 워치메이커의 길을 택했다. 1964년 태그호이어의 전신인 호이어에 입사해 크로노그래프의 매력에 푹 빠졌고, 쿼츠 파동이 일어난 후에도 CS 센터를 운영하며 기계식 시계의 미적 가치에 대한 믿을을 잃지 않았다. 1982년 문페이즈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내놓으며 크로노스위스를 시작한다. 이 외에도 케률레이터와 양파 모양 크라운 등 빈티지 요소를 발굴해 크로노스위스만의 매력으로 삼았다. 현재는 회사를 매각했다. 

  • 귄터 블륌라인(GÜNTER BLÜMLEIN)

    IWC 전 CEO 

    1943년~2001년, 독일 출생

    IWC, 예거 르쿨트르, 랑에 운트 죄네를 다시 일으켜 세우다



    고향에서 학위를 따고 인턴을 마친 그는 융한스에 엔지니어로 입사해 세일즈·마케팅 디렉터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VOD 그룹에 속한 독일 회사 LMH(Les Manufactures Horologères)의 러브콜을 받고 IWC의 수장이 되어 다 빈치 퍼페추얼을 완성하고 포르투기저와 파일럿 워치의 주요 라인업을 정비하는 등 명성의 초석을 다졌다. IWC와 함께 LMH 아래에 있던 예거 르쿨트르의 라인업이 현재 모습을 갖춘 것도 그의 공적이다. 마지막으로 고향인 독일의 시계에 애착이 깊었던 그는 발터 랑에와 함께 랑에 운트 죄네를 재건해 글라슈테 시계의 전통을 다시 확립했다. 

  • 기 시몬(GUY SÉMON)

    연구 및 개발 전문가

    1963년~, 프랑스 출생

    태그호이어 혁신의 일등 공신



     

    연구 및 개발 전문가로, 태그호이어의 R&D 연구소와 엔지니어링 분야 책임자였으며 현재는 이사 직함을 가지고 있다. 태그호이어가 소개하는 고급 모델이나 콘셉트 워치의 개발에 크게 관여해 1/100초 계측이 가능한 까레라 마이크로 펜둘럼 투르비용, 독특한 구조의 모나코 V4 등을 담당했다. 장 클로드 비버가 태그호이어의 CEO로 부임한 후 엔트리와 미들레인지 제품을 주력으로 선보이며 혁신적인 제품의 발표는 줄어들었지만, 최근 인텔과의 스마트 워치 협력 개발 발표회에 기 시몬이 등장해 새로운 모델에 기대가 실렸다. 

  • 기스베르트 브루너(GISBERT L. BRUNNER)

    칼럼니스트

    1947년~, 독일 출생

    공신력 있는 시계 칼럼의 대가



     

    기스베르크 브루너는 17살에 호이어 까레라 크로노그래프를 구매하며 기계식 시계의 매력에 빠졌다. 그 후 다양한 시계 컬렉션에 대한 50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1983년 <Watches>라는 책을 최초로 펴낸 이래 지금까지 20권이 넘는 시계 저서를 출간했다. 

  • 니콜라스 하이에크(NICOLAS G. HAYEK)

    스와치 그룹 전 회장

    1928년~2010년, 레바논 출생

    스위스 시계 산업의 르네상스를 열다



     

    회계사로 일하며 경력을 쌓은 뒤 컨설팅 회사 ‘하이에크 엔지니어링’을 설립한다. 1980년대에 쿼츠 쇼크로 스위스 시계 산업이 위기에 몰렸을 때, 하이에크는 스위스 시계 생산을 책임지는 두 거대 회사, SSIH와 ASUAG를 합병해 스와치 그룹의 전신인 SMH를 만들었고, 저렴한 쿼츠 시계 스와치를 대성공시켜 재부흥의 물꼬를 텄다. 1984년을 기점으로 스위스 시계 산업과 함께 SMH는 흑자로 돌아섰고 하이에크는 1985년 SMH의 CEO 겸 회장에 오른다. 1990년대 블랑팡과 브레게를 차례로 인수해 피라미드 구조를 완성했고, 1999년 스와치 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 다니엘 로스(DANIEL ROTH)

    워치메이커

    1945년~, 프랑스 출생

    시계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긴 워치메이커



     

    브레게를 인수한 쇼메 형제는 오데마 피게의 워치메이커로 일하던 젊은 다니엘 로스를 영입한다. 이후 다니엘 로스는 브레게의 역사적인 퍼페추얼 캘린더와 투르비용 회중시계를 손목시계 무브먼트로 제작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브랜드를 부활시킨다. 1989년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해 활동했으나 금전적인 문제로 마지막엔 불가리에서 브랜드를 인수, 지분을 모두 넘기고 본인이 세운 브랜드와 헤어진다. 현재 그의 아들이 새롭게 설립한 브랜드 장 다니엘 리콜라에서 적은 숫자지만 매년 본인만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 다니엘 리에도(DANIEL RIEDO)

    예거 르쿨트르 CEO

    1960년~, 스위스 출생

    예거 르쿨트르의 미래를 책임지다. 



     

    제네바 대학에서 기업경영과 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예거 르쿨트르에 합류하기 전에는 롤렉스와 튜더에서 12년 동안 제품 및 마케팅 개발을 담당하면서 시계 산업 전반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2011년 예거 르쿨트르의 산업부 디렉터로 자리를 옮겨 당시 CEO였던 제롬 랑베르를 도와 예거 르쿨트르의 성공을 도왔다. 2013년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제롬 랑베르로부터 CEO 자리를 넘겨받아 예거 르쿨트르를 이끌고 있다. 

  • 도미니크 르노(DOMINIQUE RENAUD)

    워치메이커

    프랑스 출생

    파인 워치메이킹의 선두자



     

    지울리오 파피와 함께 1986년에 스위스의 무브먼트 개발 전문 제조사 르노앤파피를 설립했다. 복잡 시계에 사용하는 투르비용, 미니트 리피터,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등의 고급 무브먼트 개발에 특화된 회사이며 1992년 오데마 피게가 인수했다. 2000년 본인의 지분을 모두 브랜드에 넘기고 퇴사하며 개인 프로젝트와 다양한 워치메이킹에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액체를 유리관에 넣어 시간을 표현하는 HYT 시계 프로젝트가 있다. 얼마 전까지 은퇴한 상태였으나 올해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운 시계 컬렉션을 발표했다. 

  • 라인하르트 스트라우만(REINHARD STRAUMANN)

    엔지니어, 사업가

    1892년~1967년, 스위스 출생

    헤어스프링의 프로메테우스



     

    1912년까지 시계 기술과 정밀공학을 공부했다. 군 복무 이후에는 스키 점프의 역학을 연구해 현대 스키 점프대 건설의 기초를 닦은 적도 있다. 그는 특히 야금학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는데, 독일 헤로이스(Heraeus) 회사와 함께 니켈과 철, 베릴륨을 특수하게 합금한 헤어스프링 원료 니바록스를 개발했다. 니바플렉스도 그의 작품이다. 니바록스와 니바플렉스는 1935년과 1948년에 각각 특허를 취득했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스트라우만 회사는 점점 발전해 현재 임플란트의 선도적인 제조 기업이 되었다. 

  • 레옹 브라이틀링(LÉON BREITLING)

    워치메이커

    1860년~1914년, 스위스 출생

    현대 크로노그래프의 발명가이자 브라이틀링 창립자



     

    워치메이커 견습을 마친 레옹 브라이틀링은 생티미에에 공방을 열고 ‘G Leon Breitling’이라는 브랜드를 시작했다. 1892년에는 생산 설비 확장을 위해 라쇼드퐁으로 공방을 옮겼다. 이것이 현재 브라이틀링 브랜드가 되었다. 초반부터 크로노그래프와 타이머 분야에 집중했던 그는 크라운과 별도로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수행하는 푸시피스를 발명했고, 스타트·스톱 기능을 리셋 기능에서 분리한 시스템도 만들어냈다. 이런 업적이 쌓여 브라이틀링은 1969년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개발에 성공했으며, 지금도 항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 로버트 그뢰벨(ROBERT GREUBEL)

    워치메이커

    1960년~, 프랑스 출생

    컴플리케이션 워치의 마술사



     

    워치메이커 스테판 포시와 함께 독립 하이엔드 브랜드 그뢰벨 포시를 설립했다. 두 사람은 무브먼트 제작회사인 르노앤파피에서 만나 기계식 시계의 미래, 특히 복잡시계에 대해 뜻을 두고 새로운 투르비용 시계를 만들기 위해 둘만의 사업을 시작한다.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1년 컴플리타임이라는 무브먼트 회사를 창립, 자금을 모아 2004년 바젤월드에서 첫 시계를 선보였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발명한 투르비용을 현대에 가장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브랜드로도 평가받고 있다. 

  •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과학자

    1635년~1703년, 영국 출생

    헤어스프링 개념의 창시자



     

    영국의 자연 철학자이자 과학자. 현대 현미경학의 기본서인 마이크로그라피아를 출판했으며, ‘세포’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용수철과 같이 탄성이 있는 물체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었을 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복원력의 크기와 변형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법칙인 후크 법칙을 발견했다. 이를 기반으로 균형 잡힌 스프링으로 조정하는 회중시계의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는데, 이것이 현대 헤어스프링 개념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1657년 추시계를 위해 앵커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을 고안하기도 했다. 

  • 로저 드뷔(ROGER DUBUIS)

    워치메이커

    1938년~2017년, 스위스 출생

    컴플리케이션의 대가이자 로저드뷔 창립자


     


    벌목꾼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공예산업에 열정을 드러냈다. 10세 되던 해 첨탑의 시계를 관리하는 일을 도우며 기계식 시계의 매력에 눈을 떴고, 제네바 시계 학교에 입학해 4년간의 공부를 마친 후 론진에서 9년간 실무를 쌓았다. 그 후 14년간 파텍 필립의 하이 컴플리케이션 분야에 몸담은 그는 독립을 결심하고 시계 복원 작업에 뛰어들었다. 1995년에는 프랭크 뮬러 출신의 카를로스 디아스와 함께 드디어 브랜드 로저드뷔를 시작했다. 경영 문제로 2003년 브랜드에서 물러났지만, 10년이 지난 2012년에 마침에 리치몬크 그룹의 로저드뷔로 복귀했다. 이후 브랜드의 상징적인 존재로 활동하다가 2017년 세상을 떠났다. 

  • 로저 스미스(ROGER W. SMITH)

    워치메이커

    1970년~, 영국 출생

    조지 다니엘스의 후계자



    16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워치메이킹의 길에 빠져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호재로 작용했다. 그의 잠재력이 빛을 발해 영국 시계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 그 후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워치메이커 조지 다니엘스와 함께 일하며 기반을 마련했다. 스승과 함께 우수한 제품을 완성하는 것은 물론 2001년에 독자적인 브랜드까지 설립하며 이름을 알렸다. 조지 다니엘스 타계 후, 그의 워치메이킹을 계승한 후계자로 현재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롤프 슈나이더(ROLF W. SCHNYDER)

    율리스 나르덴 전 CEO

    1935년~2011년, 스위스 출생

    율리스 나르덴을 되살린 수장



     

    스위스 독일어권에서 자라며 강한 조직력과 날카로운 분석력을 길렀다. 1956년 프랑스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 제네바에 갔고, 예거 르쿨트르 광고 부서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방랑을 좋아하는 기질 덕에 동남아시아와 남미에 머무르며 다이얼, 케이스, 쿼츠 모듈을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1983년 율리스 나르덴의 매각설을 듣고 브랜드를 인수한다. 천재적인 워치메이커 루드비히 외슬린과 손잡고 천체 손목시계를 제작하며 율리스 나르덴을 특별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 루드비히 외슬린(LUDWIG OECHSLIN)

    워치메이커

    1952년~, 이탈리아 출생

    율리스 나르덴의 구원자



     

    워치메이커이자 시계학 이론의 대가로 롤프 슈나이더가 율리스 나르덴을 인수한 직후 합류해 천체 손목시계, 프릭 시리즈 등 다양한 컴플리케이션 모델의 개발에 관여해 브랜드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2001년~2014년에는 라쇼드퐁에 위치한 스위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제시계박물관의 소장을 역임했다. 2006년 브랜드 옥스 운트 주니어를 설립해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시계를 선보이고 있다. 컴플리케이션에 초점을 두고 있는 현대 시계 산업과 반대로 루드비히 외슬린의 관심사는 극단적인 심플함이다. 

  • 루이 까르띠에(LOUIS CARTIER)

    까르띠에 전 CEO

    1875년~1942년, 프랑스 출생

    까르띠에 시계를 키워내다. 



     

    창립자의 후손이자 알프레드 까르띠에의 세 아들 중 첫째로 가업을 물려받았다. 시계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어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904년, 비행사 친구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을 위해 손목시계 산토스를 제작한다. 산토스는 까르띠에가 정식으로 판매한 첫 손목시계 라인이다. 그 후 술통 모양의 토노와 거북을 뜻하는 똑뛰에 이어, 1917년 마침내 까르띠에의 아이콘이자 사각 시계 장르를 대표하는 탱크를 선보였다. 탱크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루이 까르띠에는 탱크의 다양한 버전을 만들어 그 아성을 더욱 높혔다. 

  • 루이 브란트(LOUIS BRANDT)

    워치메이커

    1825년~1879년, 스위스 출생

    오메가의 탄생 공신



     

    스위스 쥐라 지역에서 태어난 루이 브란트는 23세가 된 1948년 라쇼드퐁에 회중시계를 만드는 공방을 설립했다. 외부에서 부품을 구입해 조립만 하는 방식으로 제작했고, 다이얼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고객에게 직접 시계를 보여주고 판매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각지를 누볐다. 루이 브란트의 회중시계는 특히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1877년 아들 루이 폴 브란트와 함께 ‘ 루이 브란트 앤 필스’라는 시계 공방을 만든 지 2년 후에 사망했지만, 그의 두 아들이 공방을 물려받아 1894년 오메가를 시작했다.

  • 루이 코티에(LOUIS COTTIER)

    워치메이커

    1894년~1966년, 스위스 출생

    월드타임의 창시자



     

    뛰어난 워치메이커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워치메이킹 학교에 다닐 때부터 앤티크 시계 복원에 두각을 드러냈다. 롤렉스 창립자 한스 빌스도르프가 수집한 앤티크 시계의 유지·보수도 맡은 적이 있다. 1931년 그가 첫 월드타임 회중시계를 선보인 이후로 월드타임을 표시하는 메커니즘은 일명 ‘코티에 시스템’으로 현재의 많은 월드타임 시계가 이를 따르고 있다. 한편 루이 코티에는 유럽에 대공황이 오기 전까지 여러 지역의 시계 공방에서 수장으로 일했지만, 실직한 후에는 아내의 문구점 뒤쪽에서 작은 시계 공방을 운영하며 말년을 보냈다. 

  • 뤼디거 부허(RÜDIGER BUCHER)

    칼럼니스트

    1967년~, 독일 출생

    독일 <크로노스> 편집장



    시계만 다루는 잡지를 갈망하며 기자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에브너 벨라그 그룹의 고급 필기구 매거진 <Scriptum>에서 일했다. 하지만 시계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4년 뒤 마침내 독일 <크로노스>에 입성했고, 2005년 편집장이 되었다. 

  • 리차드 밀(RICHARD MILLE)

    리차드밀 CEO

    1951년~, 프랑스 출생

    21세기 워치메이킹을 이끄는 혁신의 아이콘



    리차드밀을 최고의 하이엔드 스포츠 워치 브랜드로 키워낸 주인공. 브랑스 브장송에서 마케팅을 전공한 후 1974년 시계 회사 핀호르에 입사하며 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92년부터 주얼러 모브생의 시계 제작을 담당했고, 1999년 모브생과 이별한 후 지금의 리차드밀을 설립했다. 모브생의 컴플리케이션 시계 제작 당시 인연을 맺은 지울리오 파피의 도움으로 르노앤파피가 개발한 무브먼트를 사용해 2001년 리차드 밀의 이름을 내건 첫 시계 RM001을 발표했다. 

  • 리카르도 과달루페(RICARDO GUADALUPE)

    위블로 CEO

    1965년~, 스위스 출생

    위블로 성공의 숨은 주역



     

    스위스 비즈니스 스쿨을 마치고 미국의 UCLA를 졸업했다. 이후 불가리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7년간 근무하며 시계 사업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1994년 장 클로드 비버에 의해 발탁되어 블랑팡으로 옮겨 인터내셔널 세일즈, 마케팅 디렉터로 근무했다. 2001년 블랑팡을 떠난 뒤 2004년 위블로의 CEO가 된 장 클로드 비버의 요청으로 위블로에 합류해 위블로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2012년 장 클로드 비버의 뒤를 이어 위블로의 CEO로 임명됐다. 

  • 마리아 베티나 아이히(MARIA-BETTINA EICH)

    칼럼니스트

    1967년~, 독일 출생

    독일 <크로노스> 프리랜서 에디터



     

    대학에서는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시계도 문화적인 관점에서 공경할 만한 작품으로 여긴다. 처음에는 에브너 벨라그 그룹에서 보석 분야 에디터로 일했고, 2004년부터 독일 <크로노스>에서 여성 시계 칼럼을 써왔다. 

  • 막시밀리안 뷔세(MAXIMILIAN BÜSSER)

    MB&F CEO

    1967년~, 이탈리아 출생

    아방가르드 워치메이킹을 주도하는 업계의 기린아



    스위스 외교관인 아버지와 인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위스 로잔 공과대학에서 마이크로 테크놀로지를 전공하고 예거 르쿨트르에서 7년간 근무했다. 해리 윈스턴의 매니징 디렉터로 자리를 옮긴 이후 오푸스 시리즈를 주도하며 900%의 경이로운 성장을 이끌었다. 2005년 해리 윈스턴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MB&F를 설립했다. 아방가르드한 디자인과 하이엔드 워치메이킹을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로 MB&F를 일약 최고의 인디펜던트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 미셸 파르미지아니(MICHEL PARMIGIANI)

    워치메이커

    1950년~, 스위스 출생

    위대한 시계 복원 전문가이자 파르미지아니 창립자



    1967년 오래된 빈티지와 앤티크 시계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개인 공방을 설립한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수많은 시계를 복원하며 워치메이킹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지식을 얻었다. 그의 고객이자 거대 제약회사를 거느린 산도즈 재단 역시 가문에 내려오는 유서 깊은 시계를 그에게 의뢰하곤 했다. 이를 계기로 산도즈 재단의 후원을 받아 1996년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설립했다. 대표적인 시계로 부가티 시리즈가 있다. 

  • 발터 랑에(WALTER LANGE)

    워치메이커

    1924년~2017년, 독일 출생

    랑에 운트 죄네를 살려내다



     

    랑에 운트 죄네 창립자 아돌프 랑에의 증손자. 독일 통일 이후 글라슈테로 돌아와 1990년 랑에 운트 죄네를 재창립한다. 독일 시계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했던 귄터 블륌라인과 함께 새로운 랑에 운트 죄네의 컬렉션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랑에 1, 삭소니아, 푸르 르 메리트 등 브랜드를 대표하는 시계가 바로 이때 태어났다. 이 제품들로 랑에 운트 죄네는 다시 성공을 거두었고, 글라슈테는 다시 독실 시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발터 랑에는 독일 작센 주의 워치메이킹 산업을 재건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독일 연방 공화국의 공로 훈장을 받았다. 

  • 발터 폰 카넬(VALTER VON KÄNEL)

    론진 CEO

    1941년~, 독일 출생

    40년 넘게 론진을 지켜온 스와치 그룹의 원로



    론진이 태동한 생티미에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발터 폰 카넬은 1960년 스위스 세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63년 시계 다이얼 전문 제조업체로 이직하며 시계 업계로 진입했고, 1969년 론진에 입사해 세일즈 매니저, 마케팅 매니저 등을 거쳐 1988년 론진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91년에는 작고한 스와치 그룹 전 회장인 니콜라스 하이에크의 제안으로 스와치 그룹 경영진으로 선출됐다. 생티미에 지역 사회 및 경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 뱅상 페리아르(VINCENT PERRIARD)

    HYT CEO

    1971년~, 스위스 출생

    HYT를 글로벌 브랜드로 이끈 공동 창립자



    테크노마린을 비롯해 여러 브랜드의 CEO를 거친 전문 경영인. 탁월한 사업 수완을 갖춘 그가 HYT에 합류한 건 2010년이다. 엔지니어이기도 한 그의 합세로 개발에 속도가 붙었고, 2012년 마침내 유동 액체로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 H1이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수많은 관심을 받은 터라 후속작에 부담을 느꼈을 법한데 HYT는 이에 굴하지 않고 H2를 비롯, 다이나모 기술을 결합해 LED 조명이 켜지는 H4까지 출시하며 단발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를 진두지휘한 인물이 CEO 뱅상 페리아르다. 

  • 벤자민 클라이머(BENJAMIN CLYMER)

    칼럼니스트

    1983년~, 미국 출생

    시계 전문 웹사이트 호팅키 창립자


     


    16세 때 할아버지에게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를 물려받은 것을 계기로 시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8년 컨설턴트로 근무하던 스위스 금융기업 UBS를 퇴사하고 시계 전문 블로그인 호딩키를 설립했다. 

  • 브루노 벨라미크(BRUNO BELAMICH)

    벨앤로스 CEO

    1965년~, 프랑스 출생

    벨앤로스 디자인을 창조한 디자이너 겸 공동 창립자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고 독일 시계 브랜드 진의 인턴으로 근무했다. 이후 친구이자 벨앤로스의 공동 창립자인 카를로스 로실로와 의기투합해 프랑스에서 진을 판매했는데, 이를 계기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브랜드 설립에 관한 내용을 졸업논문으로 제출해 학위를 받았으며, 이때 발표한 디자인과 디스플레이 케이스, 패키지 등을 기초로 벨앤로스의 브랜드 콘셉트와 디자인을 완성했다. 

  • 비아네 알테르(VIANNEY HALTER)

    워치메이커

    1963년~, 프랑스 출생

    가장 개성적이고 독립적인 작품의 시계제작자



     

    시계 학교 졸업 후 10년이 넘는 기간을 앤티크 시계 복원 작업에 주력하며 워치메이킹 기술을 단련했다. 1994년 자신의 제작소를 설립해 제품 제작과 복원에 박차를 가했으며 기존에 없던 독특하고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의 시계를 발표해 워치메이커이자 시계 아티스트라 불리고 있다. 많은 투자가의 지원을 거절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브랜드의 경제적인 가치보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중시한다. 대표적인 제품으로 안티콰, 오푸스 3, 트리오 등의 작품이 있으며 현재 AHCI에 소속되어 있다. 

  • 빈센트 칼라브레제(VINCENT CALABRESE)

    워치메이커

    1944년~, 이탈리아 출생

    AHCI 설립자 중 한 명



     

    특정 브랜드에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계를 만드는 독립 시계 제작자의 연합 AHCI의 공동설립자. 그는 시계에 대한 정규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성인이 된 후 판매점의 매니저로 일하다가, 남는 시간을 시계와 씨름하는 데 할애하면서 그의 직업이 워치메이커로 바뀌었다. 1977년 직선 형태의 새로운 기어트레인을 가진 무브먼트로 상을 받으면서 그 천재성이 드러났으며, 1980년 상품화되어 나온 제품이 코룸의 역사적인 골든브리지 모델이다. 이후 블랑팡의 플라잉 투르비용, 코룸의 카루셀을 설계하며 주목을 받았다. 

  • 빌헬름 슈미트(WILHELM SCHMID)

    랑에 운트 죄네 CEO

    1936년~ 독일 출생

    랑에 운트 죄네의 전통을 이어가는 전문 경영인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1989년부터 석유회사인 부르마 오일에서 세일즈와 마케팅, 경영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인 BMW로 이직했고, BMW의 남아프리카 지역 세일즈와 마케팅을 총괄할 정도로 뛰어난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BMW를 떠나 2011년 1월 랑에 운트 죄네의 CEO로 임명된 이후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 수 지아시안(SU JIAXIAN)

    칼럼니스트

    1985년~, 싱가포르 출생

    아시아를 대표하는 젊은 저널리스트



     

    젊은 나이지만 이미 15년이 넘는 시계 관련 경력을 갖고 있으며, 여러 브랜드와 옥션 하우스 및 컬렉터의 자문 역할을 맡고 있다. 자신이 운영하는 시계 전문 웹사이트 ‘Watches By SJX’로 시계 관련 소식과 정보를 전하고 있다. 

  • 스벤 앤더슨(SVEND ANDERSEN)

    워치메이커

    1942년~, 덴마크 출생

    AHIC 공동 창립자



     

    덴마크 시계 학교를 통해 워치메이킹에 입문했고, 1963년에 스위스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이력을 채워나갔다.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아 파텍 필립에서도 일했으며 1979년부터는 본인만의 공방을 차려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 후, 400년가량 프로그래밍을 마친 퍼페추얼 캘린더, 울트라신 월드타이머 등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며 명성을 드높였다. 에로티시즘을 담은 독특한 오토마통의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스테판 포시(STEPHEN FORSEY)

    워치메이커

    1967년~, 영국 출생

    투르비용의 신개념을 제시한 그뢰벨 포시 창립자


     


    1987년부터 시계 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당시에는 주로 복원과 관련된 일을 많이 했다. 1992년에 스위스로 이주했는데, 이때 르노앤파피에서 로퍼트 그뢰벨을 만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 이 둘은 브랜드를 벗어나 독자적인 사업을 구성했고, 그 결실은 2001년에 컴플리타임(CompliTime SA)으로 맺었다. 이곳에서 컴플리케이션 관련 기술을 갈고닦았으며, 2004년에 더블 투르비용 30°(2001년에 개발)와 함께 둘의 이름을 딴 브랜드 그뢰벨 포시를 설립했다. 

  • 스티븐 우콰드(STEPHEN URQUHART)

    오메가 전 CEO

    1924년~, 독일 출생

    오메가의 오랜 수장



    1968년에 오메가에서 일을 시작했다. 1974년부터 1997년까지는 오데마 피게의 공동 경영자 및 중역 임원으로 활동했다. 1997년 다시 스와치 그룹으로 돌아온 스티븐 우콰드는 블랑팡의 CEO를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오메가로 옮긴다. 그의 지휘 아래 오메가는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독립 부티크를 열고, 할리우드 스타 에디 레드메인을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등 인지도 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2016년 6월 1일자로 오메가 회장직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스와치 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것으로 보인다. 

  • 시릴 비네롱(CYRILLE VIGNERON)

    까르띠에 CEO

    1961년~, 프랑스 출생

    럭셔리 비즈니스에 정통한 까르띠에 전문가



    1988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리치몬트 그룹과 LVMH 그룹에서만 근무했을 정도로 럭셔리 비즈니스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 리치몬트의 회장을 역임했고, 2013년까지 까르띠에 유럽의 매니징 디렉터를 맡았다. 2014년 리치몬트 그룹의 강력한 경쟁자인 LVMH 그룹으로 이적해 2년간 일본 LVMH를 이끌었다. 2016년 오랫동안 몸담은 리치몬트 그룹으로 다시 돌아와 까르띠에를 총괄하고 있다. 

  • 아니타 포르셰(ANITA PORCHET)

    에나멜러

    1961년~, 스위스 출생

    현존 최고의 에나멜러



    현존하는 최고의 에나멜러. 12살 때부터 예술에 열정을 나타냈으며 라쇼드퐁에 있는 예술학교(École d’arts appliqués)에서 그 역량을 키워나갔다. 1984년에는 다양한 워치메이커와의 에나멜링 작업을 통해 이른 나이에 스페셜 에나멜러로 등극했다. 그녀와 협업을 한 대표 브랜드로는 바쉐론 콘스탄틴, 피아제, 자케드로를 꼽을 수 있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파이용(극도의 정교함을 요하는 에나멜링)’을 구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인으로 유명하다. 

  •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ABRAHAM LOUIS BREGUET)

    워치메이커

    1747년~1823년, 스위스 출생

    기계식 시계의 아버지



     

    브레게 브랜드의 시초.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15세에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의 시계 장인 밑에서 수학한 이래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투르비용의 창시자로 유명하지만 셀프와인딩 기구인 퍼페추얼의 실용화를 이룩하고, 균시차 시계와 브레게 스프링을 고안하는 등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는 기계식 시계의 기본 원리를 창시했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의뢰한 컴플리케이션 회중시계 No.160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손꼽힌다. 또한 브레게 핸즈, 브레게 숫자, 기요셰 다이얼, 코인 에지처럼 클래식 디자인 요소도 그의 아이디어다. 

  • 안드레아 스트렐러(ANDREAS STREHLER)

    워치메이커

    1971년~, 스위스 출생

    오푸스 7을 제작한 AHCI 멤버



     

    1987년, 스위스 프라우엔펠트에서 워치메이커 교육을 받으며 꿈을 키워나갔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1991년에 르노앤파피를 통해 시계 업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4년 뒤에 독립 워치메이커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독자 브랜드를 설립하는가 하면, 다수(H.모저 앤 씨, 해리 윈스턴, 모리스 라크로와 등)의 무브먼트 설계를 담당했다. 그가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모델이 해리 윈스턴 오푸스 7이다. 자체 브랜드의 대표 모델로는 빠삐용이 있다. 

  • 안젤로 보나티(ANGELO BONATI)

    파네라이 CEO

    1951년~, 이탈리아 출생

    파네라이 성공의 주역



    밀라노 가톨릭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보석 업계에서 근무했다. 1980년 방돔 그룹에 입사해 다양한 럭셔리 브랜드의 세일즈 디렉터를 역임했다. 1987년에는 까르띠에의 이탈리아 세일즈, 마케팅 디렉터가 되었다. 1993년에 지노리 그룹으로 옮겨 인터내셔널 세일즈, 마케팅 디렉터를 맡았고, 이후 트루사르디 그룹으로 이직했다. 1997년 방돔 그룹으로 돌아와 파네라이를 새롭게 정비해 세계적인 성공을 이끌었고, 2000년 파네라이 CEO에 올랐다. 

  • 알랭 실버스테인(ALAIN SILBERSTEIN)

    디자이너

    1950년~, 프랑스 출생

    새로운 지평을 연 시계 디자이너



     

    인테리어 디자이너에서 시계 제작다로 전향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이전 직업에서 얻은 좋은 영감을 시계에 재치있게 풀어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형형색색 컬러를 시계의 적재적소에(핸즈 컬러는 공통적으로 시침이 레드, 분침이 블루) 배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디테일 하나하나가 모여 제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얼핏 봐서 패션 시계로 오인할 수도 있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검증받은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투르비용과 같은 컴플리케이션도 있다. 

  • 알렉산더 린츠(ALEXANDER LINZ)

    칼럼니스트

    1964년~, 오스트리아 출생

    독일 <크로노스> 기자



     

    취미생활로 즐기던 시계를 업으로 삼은 지 20년이 넘은 베테랑. 스스로를 전형적인 시계 애호가라고 생각한다. 세계 각지에서 새로운 시계와 기술을 경험하고 관계자와 유명인사를 만난 일을 블로그에 올리며 독자와의 소통을 즐긴다. 

  • 알렉산더 크룹(ALEXANDER KRUPP)

    칼럼니스트

    1977년~, 독일 출생

    독일 <크로노스> 기자



    2006년부터 독일 <크로노스>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레트로를 사랑하며, 기계식 시계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독자에게 설명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다. 독일 <크로노스>에서는 주로 무브먼트 검사와 증명을 맡고 있다. 

  • 알버트 펠라톤(ALBERT PELLATON)

    워치메이커

    1898~1976년, 스위스 출생

    펠라톤 와인딩 시스템 개발자 


     


    워치메이커 가문에서 자란 덕에 일찍이 워치메이커의 길에 들어섰다. 특히 저명한 워치메이커였던 할아버지(알버트 펠라톤 파브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초기에는 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메가에서 일했으며 1944년부터 IWC와 인연을 맺었다. 1946년 핸드와인딩 칼리버 89를 시작으로 41, 431, 44 등 다양한 무브먼트를 개발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1950년, 칼리버 85를 통해 그의 이름을 딴 펠라톤 와인딩 시스템’을 완성하게 된다. 

  • 앙투안 르쿨트르(ANTOINE LECOULTRE)

    워치메이커

    1803년~1881년, 스위스 출생

    예거 르쿨트르가 태동하다



     

    1833년 앙투안 르쿨트르는 스위스 쥐라 산맥의 발레 드 주에 시계 부품을 제작하는 공방을 설립하고, 독립적으로 시계를 제작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1844년에는 1/1000mm 측정이 가능한 밀리오노미터(Millionometer)를 고안해 시계 부품 가공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867년 그의 세 아들이 사업을 물려받으며 시계 제작 회사로 발전시켰고, 1917년 앙투완의 손자인 자크 데이비드 르쿨트르가 에드몬드 예거와 협력관계를 맺으며 지금의 예거 르쿨트르가 탄생했다. 

  • 앙투안 프레지우소(ANTOINE PREZIUSO)

    워치메이커 
    1957년~, 스위스 출생
    ‘신의 손’이라 불리는 사나이 


     
    ‘신의 손’으로 불릴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워치메이커. 수준 높은 예술성으로 ‘시계의 피카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7살 때 처음으로 시계를 조립하는가 하면, 21살에 제네바 시계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일찌감치 천재성을 드러냈다. 이후에는 파텍 필립, 해리 윈스턴 등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실력을 발휘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때 완성한 대표적인 모델이 오푸스 2다. 세 개의 투르비용으로 화제를 모은 ‘앙투안 프레지우소 3 볼루션(Volution)’도 있다.
  • 애리얼 아담스(ARIEL ADAMS)

    칼럼니스트

    1981년~, 미국 출생

    ABlogtoWatch 대표



     

    시계 전문 웹사이트 ‘ABlogtoWatch’의 대표이자 칼럼니스트이다. 시계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호기심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이 블로그는 고급 시계와 관련해 가장 높은 트래픽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기사를 신속하게 업데이트하고 있다. 

  • 옌스 코흐(JENS KOCH)

    칼럼니스트

    1971년~, 독일 출생

    독일 <크로노스> 기자



     

    어려서부터 전문 기술에 매료된 그는 공학과 어문학을 함께 공부했다. 독일 <크로노스>에 입사한 후 시계를 테스트하고 글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잠수함에서 군복무를 하고 파일럿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도전을 즐기는 성격이다. 

  • 오렐 백스 ( AUREL BACS )

    옥셔니어

    1971년~, 스위스 출생

    시계의 가치가 그의 손에서



     

    컨설팅 회사 백스 앤 루소의 대표로 세계적인 시계 전문가이자 경매사. 시계를 수집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본인도 소장용 기계식 시계에 큰 관심을 가진다. 1995년 소더비에서 시계 전문가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2003년 크리스티 국제 시계분야의 공동 관리 책임자로 임명받아 다수의 최고가 시계 경매를 이끌었다. 일례로 2010년 진행한 경매에 1943년 생산한 파텍 필립 1527 모델의 낙찰 가격은 약 70억원대였다. 그는 단순 경매 진행자를 넘어 가치 있는 시계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 요한 루퍼트(JOHANN RUPERT)

    리치몬트 그룹 회장

    195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생

    스위스 럭셔리 워치 그룹을 거머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와 비즈니스의 거물이다. 아버지의 회사 램프란트 그룹에서 사업을 시작하며 1988년 자산 분리 과정에서 리치몬트 그룹을 설립해 본격적인 럭셔리 브랜드를 만들어간다. 까르띠에, 몽블랑 등의 브랜드를 중심으로 운영하던 중 바쉐론 콘스탄틴, 파네라이를 인수하고 1998년에는 방돔 그룹을 완전히 흡수했다. 이후에도 예거 르쿨트르, IWC, 랑에 운트 죄네 등의 고급 브랜드를 차례로 인수하며 거대 그룹이 된 리치몬트는 스와치 그룹, LVMH 그룹과 함께 럭셔리 워치의 상징이 되었다. 

  • 울리히 헤르초크(ULRICH W. HERZOG)

    오리스 명예회장

    1943년~, 스위스 출생

    오리스 부흥의 핵심



    바젤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다국적 석유기업인 셰브런에서 리테일과 홀세일 매니저로 근무했다. 셰브런이 바젤에서 취리히로 옮기자 바젤에 남기 위해 퇴사하고, 1978년 오리스의 마케팅 매니저로 입사했다. 오리스가 쿼츠 여파로 인해 경영에 어려움을 겪자 1982년 롤프 포트만과 함께 스와치 그룹의 전신인 ASUAG로부터 지분을 인수해 CEO가 되었다. 기계식 시계의 부흥을 예견하고 일찌감치 기계식 시계 생산에 주력, 오리스를 성공가도에 올려놓았다. 물론 지금도 신제품의 기획과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브랜드를 위해 일하고 있다. 

  • 웹스터 클레이 볼(WEBSTER CLAY BALL)

    볼 워치 창립자

    1847년~1922년, 미국 출생

    레일로드 스탠더드를 확립하다



     

    1891년 오하이오 주의 킵턴에서 기차가 충돌하는 대형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원인은 기관사의 시계가 4분간 멈춰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오하이오 주는 관제시스템을 정비하고 표준시를 알려줄 정확한 시계 제작을 볼에게 의뢰했다. 이에 볼은 자세차 조정, 등시성, 다이얼 가독성 등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는 정밀 시계, 레일로드 크로노미터를 제작하면서 정확성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 율리우스 아스만(JULIUS ASSMANN)

    워치메이커

    1827년~1886년, 독일 출생

    글라슈테 워치메이킹의 아버지 



     

    아돌프 랑에와 함께 글라슈테 워치메이킹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독일 뮈글리츠탈에서 기반을 닦았으며 뛰어난 수공예술로 이름을 날렸다. 글라슈테에 정착한 건 1850년으로, 이로부터 2년 뒤에 자신의 시계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당시 나이가 25살에 불과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역량이 남달랐다. 회사 설립 후, 독일 시계 산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글라슈테 시계 학교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 장 다니엘 뒤부아(JEAN-DANIEL DUBOIS)

    보셰 매뉴팩처 CEO

    1951년~, 스위스 출생

    다재 다능한 워치메이커이자 기업가



    파르미지아니의 무브먼트 공장이자 최고급 에보슈 무브먼트의 공급사이기도 한 무브먼트 전문 설계 제조사인 보셰 매뉴팩처 플러리에의 CEO. 그는 시계학에 정통한 워치메이커이며 동시에 생산 관리 엔지니어이자 뛰어난 경영자다. 다양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진 그의 능력은 매우 특별하다. 스위스 크로노메트리 협회의 대표였으며 지금도 기술 전문 대학에서 설계와 산업 조직관리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최근 플러리에 품질 협회와 시계 학교 워스텝에도 합류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 장 아드리앙 필립(JEAN-ADRIEN PHILIPPE)

    워치메이커

    1815년~1894년, 프랑스 출생

    파텍 필립의 이름을 완성한 천재 워치메이커



     

    워치메이커의 아들로 태어나 21세에 이미 공방을 열어 매년 150개 이상의 회중시계를 만들어낼 정도로 워치메이킹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회중시계의 태엽을 감던 열쇠를 대체한 크라운 방식 와인딩 기구도 그의 발명품이다. 1845년에는 미니트 리피터를 탑재한 회중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1844년 파리 박람회에서 만난 앙투안 드 파텍과 의기투합해 워치메이커로서 회사를 공동 경영하게 된다. 파텍 필립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또한 그는 퍼페추얼 캘린더 기구도 만들었는데, 그가 사망한지 5년 뒤에 특허를 받았다. 

  • 장 앙투안 레핀(JEAN-ANTOINE LÉPINE)

    워치메이커

    1720년~1814년, 프랑스 출생

    레핀 양식 무브먼트를 확립하다



     

    어릴 때부터 기계 분야에 재능을 드러냈고 스위스 제네바의 공방에서 수학하며 시계 경력을 쌓았다. 24살이 되던 1744년 프랑스로 옮겨와 루이 15세의 시계공인 안드레 샤를 카론(André-Charles Caron)의 제자로 지내다 1762년 마침내 마스터 워치메이커가 된다. 그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레핀 양식 무브먼트다. 풀 플레이트만 존재했던 회중시계 무브먼트에 분할 브리지를 처음으로 적용해 조립과 분해가 쉽고, 시계 두께 역시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훗날 IWC의 칼리버 95나 파텍 필립의 215 PS 등 제네바 양식 무브먼트의 핑거 타입 브리지로 발전했다.  

  • 장 크리스토프 바뱅(JEAN-CHRISTOPHE BABIN)

    불가리 CEO

    1959년~, 프랑스 출생

    럭셔리 세일즈와 마케팅을 거머쥐다



     

    21세의 이른 나이로 MBA를 취득한 후 프랑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 장 크리스토프 바뱅은 본격적인 커리어를 세일즈와 마케팅으로 시작했다. 다양한 브랜드에서 럭셔리 제품과 관련한 경력을 쌓은 후 2000년 태그호이어의 사장이자 CEO로 부임해 스위스 시계업계에 등장했다. LVMH 그룹이 불가리를 인수한 후 2013년 불가리 CEO로 취임했다. 혁신을 매우 중시하는 그는 불가리가 수년간 준비한 디자인, 다양한 매뉴팩처와 함께 브랜드를 크게 성장시켜 거대 시계 브랜드로서의 정점을 이끌고 있다. 

  • 장 클로드 비버(JEAN-CLAUDE BIVER)

    LVMH 시계 부문 총괄 회장

    1949년~, 룩셈부르크 출생

    시계 마케팅의 왕



    장 클로드 비버의 현재 직함은 LVMH 그룹의 시계 부문 총괄 회장이자 위블로의 회장, 태그호이어 CEO다. 과거 역사적인 브랜드지만 명맥이 끊어진 블랑팡을 성공적으로 재건하며 스와치 그룹에 합류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위블로의 CEO로 다시 등장해 혁신적인 모델을 기획하고, 뛰어난 이미지 마케팅 전략으로 위블로를 급성장시켜 현재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브랜드를 일으켜 세우는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그와 함께한 수많은 사람이 현재 스위스 시계 브랜드의 요직에 위치해 있다. 

  • 장 프랑수아 모종(JEAN-FRANÇOIS MOJON)

    워치메이커

    1966년~, 프랑스 출생

    오푸스 10의 주인공



     

    시계 업계에 종사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대학에서는 마이크로 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스와치 그룹과 IWC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기반을 마련했다. 2005년 자신의 회사 크로노드(Chronode SA)를 설립했고, 이곳에서 하이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에 특화된 기술력을 갈고 닦았다. 그 결실을 맺은게 2010년으로, 이때 오푸스 10 제작과 함께 큰 명성을 얻었다. 그 후, MB&F LM 시리즈와 HYT H1 제작에 참여하는 등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장 프레드릭 듀포(JEAN-FREDERIC DUFOUR)

    롤렉스 CEO

    1967년~, 스위스 출생

    전통적인 스위스 워치 브랜드를 거친 롤렉스의 수장



     

    블랑팡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 브랜드를 이끌던 장 클로드 비버에게 시계 산업에 대해 배웠고 지금도 그를 멘토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이후 쇼파드, 율리스 나르덴 등 스위스의 역사적인 시계 브랜드를 거쳐 제니스의 CEO를 역임했다. 특히 과도한 디자인의 제품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제니스를 다시 클래식 브랜드로 되살리면서 CEO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2015년 상장히 젊은 나이에 롤렉스 CEO로 부임했으며, 이 젊은 CEO가 앞으로 보수적인 롤렉스의 수장으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주목하고 있다. 

  • 잭 호이어(JACK HEUER)

    태그호이어 전 회장

    1932년~, 스위스 출생

    까레라의 아버지



     

    4대째로 가업을 이어 호이어 사에 입사하며 시계 경력을 시작한다. 엔지니어로서 까레라 파나메리카 랠리에서 영감을 받아 까레라 컬렉션을 탄생시켰고,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11을 개발했으며, 1/100초 측정이 가능한 쿼츠 스톱워치 마이크로스플릿 800을 제작하며 호이어에 크게 기여했다. 삼촌과 아버지의 지분으로 경영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다른 회사가 호이어를 매입하며 1982년 호이어에서 물러나게 된다. 1999년 태그호이어 CEO 장 크리스토프 바뱅의 권유로 브랜드에 돌아와 2001년 명예회장으로 취임했다. 

  • 제랄드 젠타(GERALD GENTA)

    시계 디자이너

    1931년~2011년, 스위스 출생

    시계 디자인의 거장



    1964년 오메가 컨스텔레이션을 시작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시계 디자인을 창조해냈다. 특히 팔각형 케이스는 그를 대표하는 디자인이다. 팔각형 케이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로, 럭셔리 스포츠 워치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걸작으로 꼽힌다. 로열 오크와 함께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 IWC의 인제니어는 제랄드 젠타의 ‘트릴로지(Trilogy, 3부작)’라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1969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브랜드도 설립해 레트로그레이드나 미니트 리피터 등 개성있는 하이 컴플리케이션을 선보였다. 브랜드 제랄드 젠타는 2000년 불가리가 인수했다. 

  • 제롬 랑베르(JÉRÔME LAMBERT)

    리치몬트 그룹 최고 경영자

    1969년~, 프랑스 출생

    시계를 향한 열정으로 CEO의 자리에 오르다.



     

    2002년 예거 르쿨트르의 CEO로 취임해 11년 동안 브랜드의 성장을 이끌며, 브랜드의 시계 기술력 정립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인물.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랑에 운트 죄네의 운영에도 관여했으며 2013년 몽블랑의 CEO로 부임했다. 몽블랑은 이미 만년필과 가죽 용품으로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지만, 시계 제조사로서는 조금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제롬 랑베르는 취임 이후 빠른 라인업 확충과 새로운 모델의 발매로 몽블랑을 파인 워치메이킹 브랜드로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2017년 11월 그동안의 성공적인 실적을 인정받아 리치몬트 그룹 내 전체 업무 집행을 총괄하는 새로운 중책 최고운영책임자(Chief Operating Officer)에 임명됐다. 

  • 조지 그라함(GEORGES GRAHAM)

    워치메이커

    1673년~1751년, 영국 출생

    이스케이프먼트에 바친 열정



     

    영국의 시계 산업이 번성한 17~18세기에 뛰어난 워치메이커 토머스 톰피온에게 배운 조지 그라함은 이스케이프먼트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715년 직진식 탈진기를 지닌 그라함 이스케이프먼트를 발명했고, 1721년에는 온도 변화에 자유로운 수은 보정 진자를 개발했다. 특히 1725년에 완성한 실린더 이스케이프먼트는 그 기술을 개방해 자유롭게 활용한 수 있게 했다. 현재 널리 쓰이는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도 이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또한 최초의 크로노그래프를 만든 것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라함은 이러한 조지 그라함의 정신을 이어받은 브랜드다. 

  • 조지 니콜라스 “닉” 하이에크 주니어(GEORGES NICOLAS “NICK” HAYEK Jr.)

    스와치 그룹 회장

    1954년~, 스위스 출생

    하이에크 전 회장의 아들이자 스와치 그룹의 수장



     

    스위스 시계를 위기에서 구해낸 니콜라스 G. 하이에크 전 스와치 그룹 회장의 아들이자 현 스와치 그룹의 회장. 프랑스에서 영화제작사를 운영한 경험을 살려 다수의 스와치 전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1994년 스와치의 마케팅 매니저로 스와치 그룹에 입사했고, 200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와치 그룹의 CEO로 올라섰다. 스와치 그룹과 실리시움 개발을 주도한 CSEM의 이사회 소속으로 전 세계 시계 업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 조지 다니엘스(GEORGE DANIELS)

    워치메이커

    1926년~2011년, 영국 출생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로 도전장을 내밀다



    영국의 노샘프턴 공예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시계 복원가로 일하며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을 발명했다. 이스케이프먼트 휠을 이중으로 배치해 마모를 최소화하는 구조였지만, 그 당시에는 생산 비용이 높고 양산이 어려워 조지 다니엘스가 직접 만든 시계에만 탑재했다. 조지 다니엘스는 여러 브랜드의 활용 방안을 논의했는데, 오메가만이 유일하게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를 받아들였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 조지 컨(GEORGES KERN)

    IWC 전 CEO, 현 브라이틀링 CEO 

    1965년~, 독일 출생

    많은 브랜드를 성공가도로 이끈 수장



     

    태그호이어에서 시계 산업에 첫발을 들였으며, 2000년 리치몬트 그룹에 합류했다. 랑에 운트 죄네, 예거 르쿨트르, IWC를 인수하는데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2002년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IWC의 CEO로 부임했다. 그는 브랜드를 전 세계적으로 성장시켰으며, 시계 산업 외에도 자신의 철학에 따라 환경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IWC는 탄소중립기업으로 인증받았다. 그 외에도 환경 보호를 위한 다양한 활동과 로레우스 스포츠 재단 후원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17년 리치몬트 그룹의 워치메이킹 및 마케팅, 디지털 총괄 수장 자리에서 돌연 사임 후 브라이틀링으로 소속을 옮겼다. 

  • 존 하우드(JOHN HARWOOD)

    워치메이커

    1893년~1964년, 영국 출생

    셀프와인딩 방식을 발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자동권총 개발에 참여한 후, 견습 생활을 마치고 워치메이커가 되었다. 1923년, 지역의 지원을 받아 셀프와인딩 손목시계를 완성하고 1924년 9월에 스위스의 특허를 취득했다. 이는 롤렉스의 퍼페추얼보다 7년이나 빠른 것이다. 또한 그의 시계는 물이나 먼지를 막을 수 있도록 밀봉한 케이스를 사용했고, 크라운 대신 회전 베젤로 핸즈를 리셋할 수 있었다. 1928년에는 블랑팡이 그의 특허 아래 셀프와인딩 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하우드 셀프와인딩 회사를 설립했지만, 대공황과 시계의 대량생산 문제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 존 해리슨(JOHN HARRISON)

    워치메이커 

    1693년~1776년, 영국 출생

    경도 측정이 가능한 정밀 시계 마린 크로노미터를 제작



     

    18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바다에서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방법이 마련되지 않아 해상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존 해리슨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항해 중에도 정확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계를 제작했다. 특히 그가 만든 H4는 61일간의 항해 동안 오차가 5초에 불과할 정도로 정확했다. 존 해리슨의 마린 크로노미터 덕분에 정확한 경도 측정이 가능해지면서 진정한 대항해 시대가 열렸고, 인류 역사의 발전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졌다. 

  • 죄르그 샤우어(JÖRG SCHAUER)

    스토바 CEO

    1969년~, 독일 출생

    두 브랜드를 이끈 워치메이커



    1990년, 22살의 나이에 독립 워치메이커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5년 동안 400개가 넘는 시계를 직접 제작하며 기술을 갈고닦았다. 이를 통해 기반을 마련한 1995년,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설립하게 된다. 이듬해는 스토바 CEO로도 취임하며 그 영역을 더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사실상 두 개의 브랜드를 동시에 운영한 셈이다. 엄연히 다른 브랜드지만 같은 철학을 투영해 기초 설계부터 완성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독자적으로 진행해 오고 있다. 

  • 지울리오 파피(GIULIO PAPI)

    워치메이커

    1965년~, 스위스 출생

    ‘르노앤파피’의 공동 설립자 



     

    처음에는 시계 수리 관련 일로 시작해 차츰 그 영역을 넓혀갔다. 1984년,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그에게 오데마 피게가 손을 내밀었다. 그 후 워치메이커로서 본격적인 길을 걸었으며, 1986년에 도미니크 르노와 함께 (컴플리케이션에 특화된) 무브먼트 제조사 르노앤파피를 설립했다. 훗날 다시 오데마 피게에게 경영권이 넘어갔지만, 이들이 설립한 회사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매뉴팩처로 성장했다. 이곳을 거쳐간 걸출한 워치메이커도 한둘이 아니다. 

  • 카리 보틸라이넨(KARI VOUTILAINEN)

    워치메이커

    1962년~, 핀란드 출생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인정받다



     

    1990년부터 미셸 파르미지아니와 함께 일하며 이름을 알렸다. 1999년에는 자신이 다닌 스위스 시계 학교(워스텝, WOSTEP)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교육자의 길을 걷는 중에도 꾸준히 기술력을 가다듬었고, 2002년에 이르러 본인의 이름을 딴 브랜드 보틸라이넨을 설립하게 된다. 그의 진가가 발휘된 건 이로부터 5년 뒤, 옵저버트와 모델이 GPHG에서 남자 시계 부문을 수상하면서다. 피니싱 장인으로 알려졌다. 

  • 칼 프레드리히 슈펠레(KARL-FRIEDRICH SCHEUFELE)

    쇼파드 공동 CEO

    1958년~, 독일 출생

    쇼파드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다



     

    1963년 슈펠레 가문은 제네바에 있는 쇼파드 시계 경영권을 인수했다. 성인이 되어 가족들이 경영하는 회사에 입사해 전방위로 모든 관계 부서에 근무하면서 회사 경영의 기초를 배웠다. 현재 쇼파드의 공동 사장으로 플러리에에 있는 쇼파드 제조공장과 모든 경영 활동에 관한 것들을 책임지고 있다. 젊은 시절 여행과 비즈니스 출장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겪은 다양한 경험을 브랜드 컬렉션으로 재해석했다. 대표적인 모델로 자동자 경주대회와 함께 탄생한 레이싱 시계의 아이콘 밀레밀리아가 있다. 

  • 캐롤 포레스티에 카사피(CAROLE FORESTIER-KASAPI)

    워치메이커

    1969년~, 프랑스 출생

    까르띠에 무브먼트 개발 책임자



     

    시계 업계에서 드문 여성 마스터 워치메이커. 두 부모와 오빠가 모두 워치메이커인 덕에 어릴 때부터 시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6살에 파리에서 라쇼드퐁으로 넘어와 워치메이킹을 본격적으로 배웠으며, 르노앤파피를 거쳐 1999년부터 리치몬드 그룹에 합류했다. 6년 뒤에는 까르띠에 무브먼트 개발 디렉터까지 맡을 정도로 그 역량이 뛰어났다. 기본 모델부터 고유의 스켈레톤과 컴플리케이션까지, 까르띠에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무브먼트가 그녀의 손을 거쳐 탄생한 셈이다. 

  • 커트 클라우스(KURT KLAUS)

    워치메이커

    1934년~, 스위스 출생

    IWC를 대표하는 워치메이커



     

    알버트 펠라톤의 제자로도 잘 알려진 워치메이커. 1957년에 IWC에 입사해 브랜드와 함께 시계 업계에 분 풍파를 이겨냈다. 1958년에는 다 빈치 퍼페추얼 캘린더 제작을 통해 브랜드 재건에 초석을 놓을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 인하우스 무브먼트의 기클을 마련한 것도 그의 몫이다. 2004년 포르투기저 미스테르 제작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그 후에도 테크니컬 앰배서더로서 전 세계를 순회하며 IWC를 위해 일하고 있다. 

  • 크리스토프 클라레(CHRISTOPHE CLARET)

    워치메이커

    1962년~, 프랑스 출생

    전례 없는 컴플리케이션의 대가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워치메이커. 10대 때부터 워치메이킹에 재능을 드러내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공방을 차렸다. 1989년에 율리스 나르덴의 재건을 도운 산 마르코 자케마르를 출시했으며, 이때 스위스로 이주해 새로운 기틀을 마련했다. 그 후, 오푸스 4(2004년)를 통해 뛰어난 기술력을 입증했고 전무후무한 컴플리케이션을 통해 해당 분야의 대가로 올라섰다. 그의 명성을 드높인 대표적인 모델이 카지노 3부작과 자성을 역이용한 X-TREM-1이다. 

  •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

    과학자

    1692년~1695년, 네덜란드 출생

    진자시계 상용화와 밸런스 스프링을 사용한 시계를 개발하다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발견한 진자의 등시성을 기초로 진자시계를 개발했다. 사이클로이드 곡선으로 운동하는 그의 진자시계는 오차를 획기적으로 줄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진자시계가 외부 충격과 흔들림에 취약함을 깨닫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진자시계의 추 대신 최초로 둥글게 말린 밸런스 스프링을 제작했다. 이로 인해 시계의 소형화가 가능해졌으며, 현대 시계 이론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 토마스 반카(THOMAS WANKA)

    칼럼니스트

    1962년~, 독일 출생

    <우렌> 편집장



     

    독일 시계 전문지 <우렌>(1989년 창간)의 편집장으로, 몇 해 전에는 기스베르트 부르너와 함께 전 세계 시계 전문가로 구성한 단체가 선별하는 시계 어워드 ‘워치 스타스(WATCH STARS)’를 세웠다. 이곳의 심사위원은 물론 운영진도 겸하고 있다.

  • 토머스 머지(THOMAS MUDGE)

    워치메이커

    1715년~1794년, 영국 출생

    레버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 개발자



     

    영국 엑세터 출신으로 14살에 런던으로 떠나 조지 그라함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6세와 영국의 조지 3세도 그의 시계를 사용했을 정도로 그 재능을 인정받아 1776년에 영국 황실 워치메이커로 임명됐다. 1748년 독립해 자신만의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영국 최고의 워치메이커로 명성이 자자했다.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의 기초가 된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를 최초로 개발했다. 

  • 토머스 톰피언(THOMAS TOMPION)

    워치메이커 

    1639년~1713년, 영국 출생

    영국 워치메이킹의 시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계 협회인 런던 클락메이커 협회의 초창기 회원이자 조지 그라함을 비롯한 수많은 영국 워치메이커의 스승이다. 그리니치 왕립천문대가 완공된 1676년 당시 국왕이던 찰스 2세의 명으로 천문대에서 사용할 시계를 제작했다. 밸런스 스프링을 사용한 시계에 퓨제 체인 시스템을 결합해 등시성을 높인 그의 시계는 18세기까지 영국 워치메이킹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1695년에는 실린더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까지 개발했다. 

  • 티에리 스턴(THIERRY STERN)

    파텍 필립 CEO

    1970년~, 스위스 출생

    파텍 필립을 이끄는 스턴 가문의 4대 CEO



    파텍 필립은 1932년 찰스 스턴과 장 스턴 형제가 인수한 뒤 스턴 가문의 가족 기업으로 운영하며 최고의 시계 브랜드로 성장했다. 현재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 티에리 스턴은 찰스 스턴의 아들 헨리, 손자 필립에 이어 가문의 4번째 CEO이다. 그는 가족 경영의 장점으로 어린 시절부터 스위스 시계 산업과 워치메이킹에 노출되어 성장했다. 1990년 관리 직원으로 파텍 필립에서 업무를 시작했으며 독일, 미국 시장을 경험하고 제네바에 돌아와 다양한 분야의 파트장으로 브랜드를 이끌었다. 2009년 아버지로부터 CEO를 물려받았다. 

  •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FERDINAND ADOLPH LANGE)

    워치메이커

    1815년~1875년, 독일 충색

    랑에 운트 죄네를 창립한 글라슈테 워치메이킹의 시조



     

    드레스덴 기술대학을 졸업하고 마스터 워치메이커이자 장인인 요한 크리스티안 프레드리히 굿케이스의 도제로 활동했다. 1837년 당시 시계의 중심이던 프랑스로 떠나 4년 동안 시계를 연구한 후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작센 주의 가난한 광산촌이던 글라슈테의 발전과 자신의 사업을 위해 작센 정부로부터 기금을 받아 1845년 랑에 운트 씨에를 설립했고, 1868년 아들인 리차드 랑에가 합류하면서 사명을 지금의 랑에 운트 죄네로 변경했다. 글라슈테를 독일 시계의 중심이자 공업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 펠릭스 바움가르트너(FELIX BAUMGARTNER)

    워치메이커

    1975년~, 스위스 출생

    우어베르크 공동 창립자



     

    1991년 스위스 졸로투른 시계 학교에 입학하며 워치메이킹에 입문했다. 이로부터 4년 뒤에 학위를 얻었는데, 이때 일찌감치 독립 시계 제작자로 나섰다. 당시 스무 살에 불과했지만 기술력은 컴풀리케이션을 제작할 만큼 뛰어났다. 이를 알아보고 손을 내민 사람이 시계 디자이너 마틴 프레이(Martin Frei)였다. 그렇게 탄생한 브랜드가 독창성으로 무장한 우어베르크다. 1997년에 첫 번째 시계를 선보였으며, 2005년에는 오푸스 5 제작에도 참여하며 명성을 드높였다. 

  • 프랑수아 티에보(FRANÇOIS THIÉBAUD)

    티쏘 CEO

    1947년~, 프랑스 출생

    스위스 시계 산업의 얼굴



     

    티쏘의 회장을 맡고 있는 프랑수와 티에보는 1996년 브랜드를 책임질 담당자로 스와치 그룹에 합류했으며 1997년부터 지금까지 그룹 이사회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30년간 다양한 브랜드와 수많은 시계 시장을 담당하며 얻은 풍부한 경험으로 브랜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현재 티쏘의 대표직 외에 Swiss Exhibitors 위원회의 회장직과 바젤월드 주최 위원장의 멤버이며, 스위스 시계 공급자 위원회 AMS의 부사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 프랑수아 폴 주른(FRANÇOIS-PAUL JOURNE)

    워치메이커

    1957년~, 프랑스 출생

    오푸스의 서막을 연 F.P. 주른 창립자



    현대 시계사를 대표하는 워치메이커. ‘브레게의 재림’이라 칭송받을 정도다. 수준 높은 회중시계 제작으로 이름을 알렸고 1999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독립 브랜드를 설립했다. 이로부터 2년 뒤, 오푸스 시리즈의 서막을 연 ‘오푸스 1’을 개발하며 큰 명성을 얻었다. 이후에는 자신의 브랜드에 집중해 내실을 다녔다. 독창적인 메커니즘과 뛰어난 완성도 덕에 F.P. 주른은 금세 하이엔드 브랜드로 올라섰다. 대표 모델로는 크로노미터 수버랭이 있다. 

  • 프랑수와 앙리 베나미아스(FRANÇOIS HENRY BENNAHMIAS)

    오데마 피게 CEO

    1946년~, 프랑스 출생

    새로운 도전과 혁신의 오데마 피게 경영자



    프로 골프 선수 출신이며 프랑스 골프 투어 넘버 25위에 오른 기록이 있다. 그는 새로운 도전으로 럭셔리 패션 산업에서 경력을 쌓았고 1994년부터 오데마 피게에서 커리어를 시작한다. 다양한 국가에서 브랜드 책임 업무를 맡았으며 1999년 북미 지역 CEO로 부임했다. 이후 멕시코 및 남아메리카 시장까지 담당 지역을 확대했고 2012년 오데마 피게 CEO로 임명되었다. 오데마 피게의 역사와 하이엔드 브랜드로서 자리를 지키기 위한 전략을 충실히 세우고 있으며 예술과 골프 분야와의 인연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 프랭크 뮬러(FRANCK MULLER)

    워치메이커

    1958년~, 스위스 출생

    천재적인 워치메이커이자 프랭크 뮬러 창립자



     

    프랭크 뮬러는 제네바의 시계학교에 입학해 3년간의 교육과정을 1년 만에 이수, 수석으로 졸업한 뒤 유명 메이커의 권유를 거절하고 앤티크 시계 복원을 시작했다. 이후 복원과 함께 본인의 시계를 개발해 발표하며 1991년에 사업가 바르탕 실마케스와 함께 브랜드 ‘프랭크 뮬러’를 설립했다. 독자적인 디자인과 기능으로 프랭크 뮬러는 순식간에 톱 브랜드에 올라섰다. 특히 다양한 기능을 합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모델을 연달아 소개하며 천재적인 워치메이커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 플로렌타인 아리오스토 존스(FLORENTINE ARIOSTO JONES)

    워치메이커

    1841년~1916년, 미국 출생

    미국식 대량 생산과 스위스 워치메이킹의 접목을 시도한 IWC의 창립자



     

    미국 보스턴 출신의 워치메이커이자 엔지니어로 E.하워드 워치&클락에서 부소장 겸 매니저를 지냈다. F.A. 존스는 미국보다 저렴한 임금과 분업화된 스위스 시계 산업 구조에 주목했다. 스위스의 기술과 저렴한 노동력을 기반으로 공장에서 고품질 시계를 대량 생산해 미국 시장에 판매하기로 결심하고, 1868년 샤프하우젠의 하인리히 모저의 지원을 받아 인터내셔널 워치 컴퍼니(IWC)를 설립했다. 

  • 피에르 자케 드로(PIERRE JAQUET DROZ)

    워치메이커 

    1721년~1790년, 스위스 출생

    오토마통의 대가



     

    라쇼드퐁의 워치메이커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시계 제작에 눈으 떴으며, 1738년 처음으로 자신의 공방을 세울 정도로 재능이 남달랐다. 자신의 시계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작한 움직이는 자동인형, 오토마통으로 더 유명하다. 그의 시계와 오토마통은 스페인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중국의 청 왕조에까지 알려졌다. 아들인 헨리 루이 자케 드로와 양자인 장 프레드릭 레쇼와 함께 수많은 오토마통을 제작했다. 

  • 피터 스타스(PETER STAS)

    프레드릭 콘스탄트 CEO

    1963년~, 네델란드 출생

    고급시계의 저변 확대에 앞선 프레드릭 콘스탄트의 창립자



     

    피터 스타스는 그의 아내 알레타 백스와 함께 1988년 시계 브랜드 프레드릭 콘스탄트를 창립한다. 이후 지금까지 CEO로 브랜드를 운영하며 생산 규모와 퀄리티를 꾸준히 증가시켰다. 1992년 첫 시계 컬렉션을 선보인 후 2000년대 매뉴팩처 무브먼트까지 생산하며 빠른 속도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고 고급 시계 브랜드로서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독립 브랜드였던 프레드릭 콘스탄트는 2016년 5월 시티즌이 인수해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으며, 피터 스타스의 거취에 대해서는 아직 발표된 바가 없다. 

  • 피터 스피크 마린(PETER SPEAKE-MARIN)

    워치메이커

    1968년~, 영국 출생

    각광받는 천재 워치메이커



    영국 시계 학교를 시작으로 스위스 워스텝(WOSTEP)에서 하이엔드 컴플리케이션 과정을 이수하며 실력을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1996년에 스위스로 이주해 독립 시계 제작자가 됐다. 르노앤파피와 피아제를 거치며 이름을 알렸고 2000년에 자체 브랜드를 설립했다. 그 후, 여러 선배 워치메이커와 협업은 물론 고유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모델을 개발해냈다. 대표적인 모델이 챕터 시리즈(원 & 투)와 스피크 마린 스피릿 시리즈다. 

  • 필립 듀포(PHILIPPE DUFOUR)

    워치메이커

    1948년~, 스위스 출생

    당대 최고의 워치메이커



     

    ‘시간의 철학자’로도 불리는 위대한 시계 장인, 3대가 워치메이커인 가문에서 자란 덕에 일찌감치 시계에 관심을 보였고 15살에 시계 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예거 르쿨트르와 오데마 피게를 거쳐 1978년에 독립 워치메이커가 됐다. 이후의 업적은 그의 위상을 입증한다. 미니트 리피터와 그랑&프티 소네리를 동시에 결합한 걸작을 완성하며 시계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정통 스위스 워치메이킹을 투영한 듀얼리티와 심플리시티 역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 하인리히 모저(HEINRICH MOSER)

    H. 모저 앤 씨 창립자

    1805년~1874년, 스위스 출생

    샤프하우젠 워치메이킹의 터를 닦은 개척자



     

    샤프하우젠에 시계 공장을 세우려던 계획이 주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1828년 H. 모저 앤 코를 설립했다. 뛰어난 사업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1년 뒤 르로클에 공장을 세워 회중시계를 생산했다. 러시아에서 거둔 성공을 기반으로 유럽과 아시아까지 사업을 확장했고, 1848년에 다시 샤프하우젠으로 돌아온다. 1853년 시계 케이스 공방을 설립했고, 라인강댐을 건설하는 등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 

  • 한스 빌스도르프(HANS WILSDORF)

    롤렉스 창립자

    1881년~1960년, 독일 출생

    손목시계 시대를 예견하다. 



     

    12세에 고아가 되어 삼촌과 숙모에게 의탁했다. 학업을 마친 후 제네바로 떠나 보석 무역업에 종사했으나, 라쇼드퐁의 시계 회사 쿠로 코르텐에 근무하면서 시계에 대한 열정을 품었다. 1903년 런던으로 이주한 후 1905년 파트너 알프레드 제임스 데이비스와 빌스도르프 & 데이비스를 설립했다. 1908년 마차를 타고 가던 중 우연히 떠오른 단어 ‘롤렉스’를 상표로 등록한 후, 1915년 롤렉스 시계로 사명을 변경했다. 롤렉스의 자매 브랜드인 튜더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 핫토리 긴타로(HATTORI KINTARO)

    세이코 창립자

    1860년~1934년, 일본 출생

    일본 시계의 대부



    도쿄 쿄바시의 남성용품점 츠지야에서 근무하며 무역상의 꿈을 키웠으나 우연히 시계 매장에 들른 것을 계기로 시계에 매료되었다. 많은 시계 매장을 전전하며 판매와 수리를 익히던 중 근무하던 가게가 도산하자 1877년 도쿄로 돌아와 4년 뒤인 1881년 K. 핫토리 앤 코를 설립했다. 긴자를 중심으로 시계 판매와 수리 사업이 성공하자 시계를 직접 제조하기로 마음먹고 1892년 세이코샤 공장을 세워 최초의 벽시계를 생산했다. 

  • 후안 카를로스 토레스(JUAN-CARLOS TORRES)

    바쉐론 콘스탄틴 CEO

    1956년~, 스페인 출생

    바쉐론 콘스탄틴 성장의 산증인



    후안 카를로스 토레스는 1981년 25세의 나이로 브랜드에 입사해 회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한 산증인이다. 무역학교 졸업 후 숫자에 강한 자신의 장기를 앞세워 회계 파트를 맡았으며 이후 점점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아 브랜드의 핵심 인재로 승진했다. 2005년 250주년을 맞이한 바쉐론 콘스탄틴은 그동안의 모범적인 경력을 쌓은 후안 카를로스 토레스를 CEO로 임명했다. 지식의 전수와 계승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누구보다 장인을 존중하며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 히로타 마사유키(HIROTA MASAYUKI)

    칼럼니스트

    1974년~, 일본 출생

    일본 <크로노스> 편집장 



     

    12살 때 빈티지 파텍 필립을 통해 시계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 졸업 후 IT 기업 등을 거쳐 2004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일본 <크로노스>에는 2005년부터 참여했고, 2012년부터 편집 총괄을 맡아오다 지난 8월 편집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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