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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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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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의 성능에 영향을 미치는 온도와 이를 극복하려는 워치메이커의 끊임없는 도전.



파텍 필립의 칼리버 GS AL 36-750 QIS FUS IRM. 온도 변화에 의한 오차를 조정했음을 알리는 문구(Adjusted Heat and Cold)를 새겼다.


최초의 연구


심장처럼 요동치는 스프링을 워치메이킹에 도입한 로버트 후크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현대 시계의 토대를 마련했다. 시계의 정확성은 크게 향상됐지만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온도 변화에 의한 오차였다. 철로 만든 밸런스 스프링이 온도 변화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심각한 오차를 유발한 것이다. 워치메이커들은 온도에 의한 오차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마린 크로노미터로 유명한 존 해리슨도 그들 중 하나였다. 마린 크로노미터의 오차는 생명과 직결된 것이었기에 온도에 의한 오차는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존 해리슨은 온도 변화에 따라 구부러지고 펴지기를 반복하며 스프링의 길이를 조절해주는 바이 메탈릭 스트립을 개발해 마린 크로노미터에 사용했다. 그가 만든 시계는 당대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지만 온도에 의한 오차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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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 메탈 밸런스 휠. 바깥쪽은 황동으로 제작해 노란색을, 안쪽은 철로 제작해 회색을 띤다. 두 군데가 끊어진 것은 바이 메탈 밸런스 휠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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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금속


영국의 토머스 언쇼는 피에르 르로이나 존 해리슨의 아이디어를 보완해 새로운 부품을 만들었다. 바깥쪽은 황동으로, 안쪽은 철로 만들어 이어 붙여 금속의 열팽창 원리를 이용해 오차를 보정하는 바이 메탈 밸런스 휠이었다. 온도가 올라갈수록 철이나 청동으로 만든 일반적인 밸런스 스프링의 길이는 길어지고 탄성은 떨어져 시간이 점점 느려졌다. 같은 상황에서 철보다 열팽창률이 높은 밸런스 휠 바깥쪽의 황동이 안쪽으로 살짝 구부러지면서 밸런스 휠의 관성 모멘트가 감소해 시간이 빨라졌다. 즉 밸런스 휠이 밸런스 스프링에 의한 오차를 상쇄하는 것이다. 바이 메탈 밸런스 휠은 온도에 의한 오차를 보정하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각광받았지만 예기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중간 온도 오차(Middle Temperature Error)였다. 모든 온도에서 발생하는 오차를 완벽하게 보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워치메이커들은 높은 온도와 낮은 온도를 임의로 설정해 오차를 보정했다. 그러자 높은 온도와 낮은 온도의 중간에서 시간이 빨라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온도에 의한 오차는 풀리지 않는 난제처럼 워치메이커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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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린바 밸런스 스프링을 사용해 시계를 제작했음을 홍보하는 해밀턴의 옛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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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합금의 탄생 


온도에 의한 오차는 새로운 합금의 발견으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1896년 스위스의 물리학자 샤를 에두아르 기욤(Charles Édouard Guillaume)은 열팽창계수가 0에 가깝고 부식에 강한 철-니켈 합금인 인바(Invar)를 개발했고, 인바의 일종인 아니발(Anibal)과 황동으로 바이 메탈 밸런스 휠(기욤 밸런스)을 제작했다. 기욤 밸런스는 중간 온도 오차를 제거해주었지만 제작과 조정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샤를 에두아르 기욤은 1919년 인바에 크롬을 섞은 엘린바(Elinvar)를 추가로 개발했다. 온도에 의한 변형이 적고 자성에 강한 엘린바는 밸런스 스프링의 소재로 제격이었다. 엘린바 밸런스 스프링은 인바 밸런스 휠과 함께 온도에 의한 오차를 거의 대부분 제거했다. 인바와 엘린바의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은 현대 밸런스 스프링의 표준인 니바록스(Nivarox)였다. 라인하르트 스트라우만(Reinhart Straumann)이 개발한 이 합금은 변형이 거의 없고, 산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온도 변화에도 민감하지 않았다. 니바록스 밸런스 스프링이 1°C 변화에 일오차가 0.5초 정도에 불과한 반면 구시대의 청동제 밸런스 스프링의 경우 10초나 될 정도였다. 니바록스와 함께 개발된 글루시듀어 밸런스 휠까지 가세하면서 워치메이커들은 바이 메탈 밸런스 휠과 온도에 의한 오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로운 합금의 탄생이 100년 이상 지속된 온도 보정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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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의 선구자 율리스 나르덴이 자체 개발한 실리시움 앵커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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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으로 온도 변화를 감지해 보정하는 기능을 가진 세이코의 9F 쿼츠 무브먼트. 연오차가 ±10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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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싸움


온도에 의한 오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워치메이커들은 안주하지 않았다. 새로운 해답을 찾아 나선 그들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실리콘은 온도 뿐만 아니라 자성과 윤활유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연구 초반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은 온도 변화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드러났지만 율리스 나르덴을 비롯한 선구자들은 산화규소나 다이아몬드를 코팅해 온도 변화에도 민감하지 않은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제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으로 자성이나 충격뿐만 아니라 온도를 극복하는 브랜드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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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워치를 위한 독일 공업 규격(DIN8330)을 최초로 통과한 진 103 Ti IFR. 특수 윤활유를 사용한 진의 시계는 극한의 온도에서도 정확성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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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인 방식으로 온도를 극복하는 이들도 있다. 진은 자체 개발한 윤활유를 사용해 영하 45°C에서 80°C의 극한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시계를 선보인다. 일반적인 윤활유는 기온이 낮아지면 점성이 높아져 부품의 마찰이 심해지고 결국 오차를 발생시키지만 진의 특수 윤활유는 영하에서도 점성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80°C의 고온에서도 팰릿 포크 주얼에서 윤활유가 흘러내리지 않는다. 한편 ETA는 온도 변화에 의한 오차를 줄인 서모라인(Thermoline) 쿼츠 무브먼트를 생산한다. 일반 쿼츠보다 훨씬 높은 정확성을 자랑하는 서모라인은 크로노미터 인증에 대응하기 위한 무브먼트이기도 하다. 세이코는 하루에 540번이나 온도 변화를 감지하고 오차를 자동 보정하는 센서를 내장한 칼리버 9F를 그랜드 세이코 쿼츠 모델에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온도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위협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 또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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